치마의 원주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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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조각들을 이어 붙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어른이 되었어”
가령 “모두 쉽게 녹아내리는 가난한 DNA를 가진 눈사람의 자랑스러운 후손들”(「교동에 살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서란 손바닥 위의 짧은 운명선 같은 것”(「자기장」), “허공처럼 향기로운 무덤”(「덩굴장미처럼 아가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곤/천장 가득 태어나는 꽃송이와/춤추는 파도를 바라보는 일(「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건/기억의 그림자를 주렁주렁 남긴다는 것”(「없다는 것」)이라는 표현들은 시인의 일생을 응축한 압화처럼 매혹적이고, 여기에 예민한 직관력이 더해져 낱낱의 시편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시집 『치마의 원주율』에는 첫 시집 『히라이스』에서 보여 준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이어진다. 부모의 부재로 홀로 견뎌야 했던 시간들. 그것은 가난이나 죽음이 불편한 시선처럼 존재하는 삶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집에는 ‘없음’의 상실감을 안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치열하게 녹아 있다. 이를테면 과거의 비극적인 삶에서 파편화된 고통들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도 그렇다고 내치지도 않으며, 시인은 자신을 거칠고 강하게 몰아붙인다. 아직은 좀 더 떠돌겠다는 듯 온몸으로 생을 감내하겠다는 듯.
해설을 쓴 이병국 문학평론가는 “김애리샤 시인이 반복적으로 구성해내는 고통의 순간과 그로부터 파생된 존재의 자기염오自己厭惡가 지닌 정동은 유토피아를 상실한 자가 ‘시’라는 헤테로토피아를 통해 결여를 재영토화하려는 수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작가의 말
누군가와 같이 부르던 노래를
혼자 불러야 할 때가 온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준
엄마, 아빠
당신들과 같이 부르던 노래를
혼자 부를 수밖에 없는 지금
나는 만질 수 없는 당신들의
지나간 시간을 뜯어 먹으며
당신들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나는 나 때문에 고아가 되었다
2021년 겨울
김애리샤
목차
- 1부 종이를 구기면 채송화가 피어납니다
외포리 여인숙
교동에 살았다
쓸쓸한 전성기
스무 살 무렵
성장통
너는
선물을 받으면 좋겠어
치마의 원주율
허물어지는 새
반복되는 반복이었다
덩굴장미처럼 아가야,
나는 엉망입니다
당신의 플루토
천사
난정초등학교
2부 그녀 등에 새겨진 물고기의 뼈를 본다
새의 발에 신발을 그려 주고 싶었다
뼈로 만든 바이올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
없는 당신
웃는 사람
등에 새겨진 물고기의 뼈
자기장
바람의 형태
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
나는 죽어서 악보가 되겠습니다
쓸쓸한 사람들은 구름 속에서 자기 얼굴을 자주 파내곤 한다
감나무 아래에서
죽산포
원기소와 까만 빵
고요하게 떠다니는 소리들이 별자리를 만들었다
3부 아버지가 와서 내 손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다
기일
스위치
비문증
종이 인형
신경치료
아빠 심기
마리오네트와 함께 춤을
라일락꽃 속에서
김매는 사람
보신탕 끓이는 남자
분꽃
엄마가 상 받던 날
수정산 우물로 떨어지던 함박눈
샴
찢어진 조각들을 이어 붙이며
분갈이
4부 난 진화하지 못해서 예쁜 동물
앵무새 되기
낙타와 눈곱
싱글맘
완충지대
오빠, 그뿐이야
원 플러스 원
토르소
액자
실수 같은 봄이 찾아와
다정한 뱀
쓸모없이 중요한 말들을 중얼거린다
미스터 플라워
자화상
자위
해설
그림자의 기억, 저 빛나던 그때로부터
-이병국(시인ㆍ문학평론가)
추천사
-
김애리샤는 두 개의 혀를 가지고 있다(“나의 혀는 반은 공룡이고 반은 꽃입니다”, 「쓸모없이 중요한 말들을 중얼거린다」). 하나의 혀로는 청춘의 고통을 말하고, 다른 혀로는 그 고통에 감응하며 함께 응시해 주는 이들을 부른다. 고통의 풍경을 반복하고, 고통의 신열 속에 떠오르는 흐릿한 얼굴들을 끊임없이 소환하는 것. 시인이 “나는 만질 수 없는 당신들의/지나간 시간을 뜯어 먹으며/당신들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시인의 말」)고 고백한 까닭이 여기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이 다가간들, 그 얼굴은 흐릿하다. 흐릿한 것들은 우리를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든다. 거리가 좁혀지고 그 얼굴이 명징하게 보일 때, 우리는 그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하여 자신을 투기投棄하는 시인을 만난다. “나는 죽어서 아버지의 악보가”(「나는 죽어서 악보가 되겠습니다」) 되고, “동그라미 속에 알을 배고/죽은 엄마를 낳”(「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는 시인의 뒷모습이 그것이다. 응당 이와 같은 말에는 어떤 출렁거림이 뒤따른다. “밤새 얼음을 뒤집으며 들썩이는 파도 소리”(「외포리 여인숙」) 같은…. 시집 곳곳에 바다가 출렁이지만, 이 바닷속에는 고통이 갇혀 있고, 흐릿한 당신들의 얼굴이 갇혀 있고, 그것을 보기 위해 내던진 시인이 갇혀 있다. 때문에 이 시집을 읽는 일은 아프고, 저리다. 이 아픔에 공명되고 있음을 느낄 때, 어느새 우리의 혀도 두 개가 되어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
낮은 굽의 신발을 신어도
곧게 걸을 수가 없어서 나는
뾰족뾰족 무한다각의
원주율을 가지고 있어서
그 꼭짓점들 중 어떤 것들은
무디게 갈아내고 싶어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지만
캄캄한 밤들만 진열되어 있어서
조금씩 벌어질 수밖에 없는미래들과
더 먼 미래들
나는 쓸모없는 모서리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치마의 원주율」 부분
아빠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항문에서 찌그러진 달덩이가 굴러 나왔다
파내도 파내도 계속 나오는 달덩이
아빠는 점점 가늘어졌다
아빠 속을 다 파먹은 벌레들이 살이 올라
달덩이 흉내를 내며 아무렇게나 빛났다
가난도 아빠를 파먹고 무성하게 자랐었는데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일수록 부지런히 자란다
아빠가 헝겊 인형이라면 배를 가르고
가증스런 빛들로 가득 찬 아빠의 장기들을
과일칼로 세심하게 도려내고 싶었다
그 속엔 우리의 시간이 얼마나 들어 있을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생 아빠에게 달라붙어 있던 허울 좋은 친절들과
가족들에게만 엄격했던 회초리들과 엿 같았던 고집들을
파내는 일, 아빠 똥구멍에서 병든 달덩이를 채굴하는 일
한때 생명의 기원이었을 아빠의 쭈글쭈글한 고환 아래가
축축하지 않도록 새삼스럽게 잘 닦아 주는 일
아빠는 하루에 여덟 번씩 기저귀를 갈았다
아빠가 가벼워질수록 내가 무거워져서 행복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분
없는 당신은 백목련 나무처럼
불쑥불쑥 발작하듯 꽃을 피워내
목련꽃처럼 튀어나오는 당신의 하얀 발
서늘하게 내 발등에 포개지는 밤
나는 없는 당신이 살던 집의 유리창들을
모두 깨 버리고 싶어져
당신이 부르던 나의 이름이
자꾸만 엇박자로 미끄러지며
후드득 발등을 관통해
없는 당신이 아예 없어지는 건 무섭지만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밤
창밖에 우두커니 매달려
나를 내려다보는 보름달 속에선
목련나무 가지 같은 당신 손가락들이
꽃잎을 밀어내고 있어
달 속에서 떨어지는 꽃잎들이
깨진 유리 가루처럼 반짝거리고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나는
그 먼 풍경들을 바라만 볼 뿐
없는 당신이
뜬소문처럼 나를 바라보며 지나가고 있어
-「없는 당신」 전문
당신은
바람이 불면 생겨나는 사람
저쪽 끝에서 불어와 다시 저쪽 끝으로 사라지는
바람의 간격은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만큼의 거리
움직이는 모든 것들 속엔 바람의 기척이 있다
지금 막 짙어지기 시작한 나뭇잎들을 만지며 지나간
바람의 잔향이 맴도는 여기에서, 당신은
없는 모양으로 무질서하게 나타난다
내가 믿기만 하면 어디에나 생겨나는 당신
-「바람의 형태」 부분
그런 경험 있나요?
주위의 모든 것들로부터 제외당하는 거요
아플 것 같다고요?
천만에요
생각보다 숨겨진 완충지대가 넓어서 아프진 않아요
다만 그곳이 물컹하게 후드득거리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요
예고 없이 내리기 시작하는 첫눈처럼 말이에요
우린 늘 예고 없이 제외되니까요
간격의 거리는 불안정해요, 완충지대처럼요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지만 그뿐이에요
우리 사이는 그래서 결코 따뜻하지 못해요
착지하지 못한 채 울렁거릴 뿐이죠
중력이 필요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중력의 가벼움 때문에 내가 지워지고 있다는 생각
산발적으로 지워지며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
그러면서 이미 제외되고 있는 거죠
가까워질 수 없기로 결정되어 있는 거라고요
걱정이나 슬픔 따위는 집어치우고 온도만 생각하세요
더위와 추위가 교차하는 지점이요, 그곳에서
내가 제외되는 온도는 몇 도일지 알아내야 해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마주 보지 못해 아쉽다는 구차함들은
변명만 길러낸다는 걸 알잖아요
우리가 각각의 섬으로 떨어져 내리듯
첫눈이 내리는 오늘 아침
키우던 완충지대가 사라지고 있어요
나의 팔과 다리는 어디에 착지해야 할까요
나는 매일매일 제외되고 있어요
-「완충지대」 전문
나를 사면 아기를 돌보는 노인을 드립니다
우린 모두 쓰고 남잖아요
그러니까 반품은 미덕이 아닙니다
약간의 수치심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야 더 세심하게 나뉠 수 있습니다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나를 팔아 보겠습니다
누구, 나를 사실 분 없나요?
나를 사면 강아지와 욕실과 검은 방과 지옥을
덤으로 드립니다
나를 사 가세요
원 플러스 원, 그리고 플러스 알파
나는 당신의 당신입니다
-「원 플러스 원」 부분
기본정보
ISBN | 9791191262933 | ||
---|---|---|---|
발행(출시)일자 | 2022년 01월 01일 | ||
쪽수 | 167쪽 | ||
크기 |
125 * 201
* 17
mm
/ 178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걷는사람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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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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