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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 [2024-5회 겨울 선경문학상]식물복지/김륭,돼지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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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53회 작성일 2024-12-31 16:27:58 댓글 0

본문

식물복지/김륭

 개가 산책을 할 때 새는 기도를 한다.
 그녀가 말했고 나는 웃었다.
 식물처럼

 새는 왜 새가 되었는지 개는 왜 개가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새와 개는 마음이 잘 통할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새와 개 사이에 놓인 커다란 구멍, 누가 돌로 구멍을 막아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커다란 돌처럼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

 새를 본다. 새는, 개와 잘 놀아줄 것 같다. 이런 생각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은 나보다 늙은 배롱나무에게 들었다.

 내가 있어도 외로워?

 외롭다는 말은 마음이 식물처럼 걷는다는 말!

 배롱나무는 너무 자주 머리를 긁는다.

 그녀와 내가 개와 새처럼 걷다가 잠시 멈춰 서 있을 때였다.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죽을 수도 있다고 바람이 말했다. 나는 바람과 말이 잘 통한다. 빌어먹기 딱 좋은 이 말을 나는 그녀에게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했던 대부분의 연애가 실패로 돌아간 건 태어날 때부터 식물적인 감각이 없었기 때문. 나는 그녀 그림자 밑에 발을 넣고 걷다가 여우비를 떠올렸지만,

 죽었지.

 마음과 마음은 더 이상 마주치지 않을 거예요.

 저만치 팔랑팔랑 앞서 걷는 노란 나비를 보고 개가 펄쩍 뛰어오르고

 새는 또 기도를 하고, 나는 뒤를 보고 열심히 걸었다.

 바람이 오기 전에 잎을 내려놓는

 식물처럼


돼지와 비/김륭
 
 우는 사랑을 잘 먹이고 잘 입히는 마음을 쓰려다가
 죽었다고 말하면 거기, 당신은 웃겠지요.

 따라 웃는 사람도 많겠지요. 참 다행한 일이에요.
 여기가 아니라 거기여서

 당신이 웃으면 쥐도 웃을 것 같아서
 나는 조마조마

 또 비에게 가요. 비는 기다리는 일이 아니어서

 올 때 울었으니 갈 때도 울어야지 싶은
 그런 마음일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가만히 돌멩이처럼 울어주는 일, 그것은
 단 하루 동안만이라도 우려먹고 싶은
 일이어서

 나는 가끔씩 돼지를 돌보는 바람 같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때마다 잡히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런 내가 불길해질 때가 있어서

 들켜서는 안 되는 잠, 요즘 들어 자주 비가 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물끄러미
 구경만 한다.

 돼지도 돼지만큼 비를 올려다볼 수 있고 우산을 들고
 하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돼지를 빼면 가죽만 남을 것 같은
 밤, 당신과 내가 웃으면 쥐도 웃을 것 같아서

 나는 몸 밖으로 나온 나의 돼지를 오래된 연인처럼
 쓰다듬기 시작한다.


속옷만 한 고양이가 없다/김륭

 속옷만 한 갯벌이 없다. 가끔씩 나는
 파도의 얼굴을 가진다. 밥보다 밤이 필요한 날이 많아서
 배가 들어오면 볼이 빨개지는 섬 아이처럼

 해 질 무렵이면

 나는 살금살금 내 바깥으로 나간다. 늙은 얼룩 고양이를 닮은 저녁이
 담장 위로 모여든다. 이미 나를 포기한 비파나무와 너무 늦은
 불빛을 가물거리는 고깃배와 함께

 이러다간 전생까지 젖어버릴지 몰라요.
 속옷처럼 살긴 싫어요.

 가슴으로 숨어들지 못한 내가, 매일 밤 젖은 양말처럼 갈아 신어야 하는
 내가 점점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 맞물릴 때마다
 남도의 어느 작은 섬을 까맣게 뒤덮은 까마귀 떼 사이를
 솟구쳐 올라 울곤 했다.

 아무래도 속옷만 한 고양이가 없다.

 젖은 그림자를 입고 수염 가득 공중도덕을 매달고 오는 고양이처럼 살거나
 달포를 푹 삭힌 홍어처럼 살거나 아무렴 아무도 읽지 않는
 무명 시인의 시집처럼

 죽은 듯 살아남기. 속옷만 한 섬이라도 있으니까

 세탁기 속에 던져 넣었던 팬티 다시 꺼내
 입에 물고,

 울음만 한 속옷이 없다.

 나를 엿보던 얼룩 고양이가 스르륵
 파도의 얼굴을 벗어던지고
 있다.


계간 『상상인』 (2024년 겨울호- 제5회 선경문학상 수상작 6편 중 3편)

​김륭 시인
진주 출생
2007년 《문화일보》신춘문예 시, 《강원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원숭이의 원숭이』『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청소년 시집과 동시집 8권
동주문학상, 선경문학상 수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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