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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2024년 현대문학 신인상] 노랑/안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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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07회 작성일 2025-02-13 23:16:58 댓글 0

본문

노랑/안중경

너에게 노랑을 준다.
햇빛에 부서지는 생강나무 꽃
그 노랑을 준다.
어린 시절을 겹겹이 덮고 있는 모과의
노랑을 준다.
혀 위에서 가루로 녹아 흐르는 삶은 달걀의
노랑을 준다.
코 옆에서 입술 아래로 접혀 있던 창백한
노랑을 너에게 돌려준다.
매일 밤 나를 바라보던 달의 눈동자
그 노랑을 준다.
잠자리 꼬리에서 흘러내리던 동그란 알갱이의
노랑을 준다.
소나기가 그치고 난 후 하늘에 번졌던
노랑을 준다.
지붕의 테두리를 반듯하게 금 긋던
그 노랑을 준다
흰 밥알 사이로 스며들던 시금치 된장국의
그 노랑을 준다.
삼각형으로 조각나던 어린 새의 울음소리
그 노랑을 준다.
너에게 노랑을 준다.
---------
능소화/안중경
 
능소화 붉은 잎이 어떤 것은
달짝지근하고 어떤 것은
시큼하고 어떤 것은
물에 말아 먹는 밥맛이 난다.
---------
그리움/안중경
 
 
그리운 얼굴을 그리려고
빈 종이를 꺼내본다.
 
물속에서 동그랗게 빛나던
하얀 돌을 꺼내본다.
 
거미가 사라진 거미집에
눈송이로 걸려본다.
 
그림자를 떼놓으려
저 멀리로 달려본다.
 
인연이 끊어진 사람들은
지난 달력으로 남는다.
 
참나무 낙엽들이
구름의 모양을 기억한다.
---------
매실/안중경
 
이르게 떨어진 매실들이
무언가를 잃은 표정으로
길 한편에 길게 흩어져 있다.
비슷해 보이지만
뾰족하고 둥근 정도가 다르고
다르게 보이지만
크기와 색이 서로 비슷하다.
모두 어린 녀석들이다.
머리 위엔 찔레꽃이
햇빛과 놀면서 하얀 웃음을 터트리고
건너편엔 망초 대가 삐죽하다.
 
무얼 보고 이렇게 동그랗게 자란 걸까.
볼이 파이고
어깨에 금이 가고
엉덩이가 붉게 물들어도
동그랗고 동그랗다.
아직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녀석들도 있다.
저마다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알몸을 모두 보고 자란 사이
길거리도 단칸방이 된다.
---------
와르무/안중경
​​
지금 건너편 산 위에 떠 있는 잿빛 덩어리
해가 지는 쪽에서 해가 떴던 쪽으로 흐르며
테두리가 흩어지는 저것의 이름은
와르무

구름을 발음하면
하얗고 단정하고 부풀면서 위로 올라가므로
나는 입술 사이로 여러 번 내뱉으며
와르무
라고 이름 붙여본다.

건너편에 오래전부터 엎드려 있는
크고 높고 길쭉하고 뾰족하고 둥근 것은
사고릉

산을 발음하면
연결되지 않고 홀로 우뚝 솟아 있으므로
눈을 여러 번 감았다 떠도 다 담기지 않고 가깝고도 먼
그대로 또 그대로인 그것을
사고릉
이라고 불러본다.
--------
연필이 옷을 뚫었다/안중경
​​
산을 뒤집어보면 빈 하늘도 산이 된다.
높이가 아득하게 트인 산인
세상을 올려다본다.

물이 위로 흐르고 소리는 아래로 피어오른다.
​연필이 옷을 뚫었다.

산벚나무에 물소리가 붉게 맺힌다.



<작가 소개>
안중경:  1972년 춘천 출생. 서울대 서양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
|심사평|

보이는 목소리 / 이근화

    시를 잘 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단 한 명의 시인을 호명하는 일이 너무 어렵고 가혹한 것이 아니냐는 말로 심사는 시작되었다. ‘잘 쓴다’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응모자마다 갖고 있는 색다를 감각을 마주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각각의 시적 긴장과 아름다움이 있어 작품들을 견주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미래의 말들을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긴장해야 했다. 반대로 편견을 버리고 느슨해지기도 쉽지는 않았다. 함께 심사를 보는 황인찬 시인과 본심 회부작 가운데 다음 시편들을 놓고 더 오래 얘기를 이어갔다. 작품이라는 것은 혼자 읽을 때도 좋지만 함께 생각을 나누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지점들도 있었다.

  「아홉 번 도와줄게」 외 9편(정경훈)은 특별히 의미를 따져 묻지 않아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특히 표제작  「아홉 번 도와줄게」는 묘한 매력을 전해주었다. 서툰 그림들이 작품에 삽입되어 있는 것도 기묘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익숙함과 기시감이 끼어들어 심사자들을 망설이게 했고 이 시인만의 고유한 목소리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다음번 시가 더 좋을 것이라 기대했다.

  「108」 외 9편(강채현)의 고요하고 단정한 목소리에 무척 호감이 갔다. 아주 짧은 시행에도 힘을 맺히게 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 까치는 없었다」 「아몬드나무가 보이는 창가에서」는 흉내 낼 수 없이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여러 작품에서 사물과 현상에 대한 거리감과 처연함이 습관처럼 나오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일정한 형식에서만 시적 목소리가 출현하는 점도 우려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선파가 겨울을 난다」 외 9편(김혜정)의 작품들은 제목이 모두 재밌었고 제목과 시 본문이 갖는 탄력과 거리감도 좋았다. 재치와 유머 감각도 빼어나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말이 빠르고 호흡이 다소 가쁜 면이 있었는데 서둘러 다 말해버리는 방식을 고쳐가면 좋을 것 같다. 한편 작품들에서 세대나 성별 등이 너무 쉽게 읽히는 면이 있었다.

    「생명 봉사상」 외 9편(주환희)의 작품들은 시적 진술의 모호함과 대담함이 장점으로 다가왔지만 발화의 지점이 좁고 한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기계적인 단순함과 명랑함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텍스트를 통해서 시를 배울 수도 있지만 구체적인 경험 쪽으로 끌려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노랑」 외 9편(안중경)은 어쩐지 좀 부족하고 서툴게 느껴졌지만 쉽게 손에서 놓지 못했다. 제목을 단순하게 짓거나 짧게 처리한 시행을 보건대 시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보였지만 자기 감각 위에서 언어를 더듬는 솜씨가 특이했다. 현란한 목소리와 온갖 소음 속에 새 울음소리나 물소리 같은 것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이 시인은 저 혼자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차라리 고요와 침묵을 원하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소하고 여린 소리들이 어디에 어떻게 맺히는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포즈 속에서 들리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바꾸어놓는 시인의 감각이 돋보였다. 땅 아래 것들에서 저 높이 떠 가는 구름의 무늬를 나눠 가진 것들을 조심스럽게 더듬어가는 시에 심사자들은 최종적으로 손을 들었다. 작고 여린 것들에 대해, 미미하고 심심한 것들에 대해, 비슷하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닮아 있는 것들에 대해, 가깝고도 먼 것들에 대해, 그대로인 것과 뒤집힌 것들에 대해 이 시인의 시선이 아니었더라면 다시 감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게 시가 되는 순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요의 시간 위에서 닥쳐왔을 것이다.  문득.

  신인추천이 대개는 젊음과 패기, 새로움과 가능성에 대한 기대 쪽에 더 무게를 둔다면  「노랑」 외 작품들은 거기에 딱 부합하는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두 심사자가 공히 '그냥 좋아서' 뽑았다. 전망과 우려는 잠시 접어두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립식 시 생산 공정과 훈련식 도제 과정에 대한 피로가 없었다고 말하기 어렵다(우리 모두의 시가 한 발짝 나아가길 바라며, 어떤 시점에서 용기 내어 한 발짝 물러서 본다). 너무 많은 것들을 말하느라 놓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시도 멀어질 것이니 그 시간을 끌어당기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침묵과 잡음 사이 가볍게 더 멀리, 더 오래 시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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