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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2024년 현대시 신인상]빈타게 드림/사막화 계획서/읍면리/주사/몽고반/엄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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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72회 작성일 2025-03-03 19:06:25 댓글 0

본문

빈타게 드림/엄시연

돌을 깎아 만든 모형에 영혼을 가둬보자.
우리는 거기에서 기원되었다.
너는 목을 조른다. 꽃꽂이, 나비 박제,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너는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정지 에너지, 가드레일과 충돌. 찌그러진 차를 버려두고 걸었다.

오르세에서 모마까지 닳아 없어진 발을 갈러 들렀다. 떨어지는 물방울. 할머니는 거대한 호박을 톱질하기 시작한다. 흩어지는 구수한 맛. 그건 로스만큼 달지 않은데, 글쎄, 하나 확실한 건 완벽한 예술가는 없다네. 빈 그릇 하나. 거봐 너는 박쥐가 되지 못한다.

눈물을 소금으로 말려보자. 분명 나는 너를 그만큼 사랑했다.
디어 마이. 미안해. 네가 점점 작아지고 있어. 첫눈보다 빠르게. 가루약에 알약 서너 개,
살아야 했어.
너도 그랬지.
우리는 만화경에 비친 한 쌍의 타인. 깨지는 스테인드글라스, 환상으로 남는 환상.

​어느 날은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피해 달아났다. 연어마냥 밤을 거슬러 네가 없던 학교로 돌아갔다. 이름 모를 붉은 새큼달달 길쭉한 열매 따 먹던 나날. 산수유라고 알게 됐을 때 모든 것이 바랬다.
미안해. 이제는 생각이 나지 않아.

한 사람으로 시작된 모든 일에 대해 말하고 싶다.
주인을 향해 짖는 개와 하와와 아담을 쫓아낸 예수.
부모를 향해 열두 발을 쏜 범죄자.
문신을 새기는 일과 문신을 지우는 일.
그리고 차단 목록에도 들어가지 못한 전화번호.
외설보다 더 외설적인 것들에 대해.
음식 냄새 어지럽고 그럼에도 썰어 먹는 나이프와
옷차림, 화장법에 대해서. ​

길을 가다 누군가는 주름진 사람을 보고 펑펑 운다.
그럼 너는 묻는 것이다. "평소 무슨 생각해요?" 아무것도······
-----------------------
사막화 계획서/엄시연

너는 청계천 돌다리 두들겨 기어코 침수시킬 사람.
홍수다.
홍수가 밀려오면 참외도 오이도 수박도 모두 그른 것이다. 돌돌 말리면 도마뱀 또아리, 퀸아망, 요요, 위에선 탈춤 옆에선 하울링. 그냥 다 썰어버릴까, 칼 한 번 머리 위로 휘둘러서.
싱겁다, 양념 가득 손맛이 필요한 때. 쉽게 무칠 수 있게 한 덩어리로, 반찬이 되는 생각들로
우리는 부분적으로 이상하게 조합된 화성 같다.
떼놓고 보면 그럴싸하지만 붙여놓으면 못 들어주겠는
구간 반복.
소음 소음, 하늘에서 작열하는 소음
천둥 재앙 가난,
감나무 댁 할머니를 도우러 갔다.
지난날에 묶어뒀던 복순이가 강으로 끌려 들어가서 뿌리 뽑힌 감나무와 물 떨어지는 슬레이트 아래 불은 고추들이 즐비해서 이번 추석날 조상 뵈기 부끄럽다며 그 감나무가
목 걸기에도 애매한 감나무라 참 다행이다.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슬픈 나무라
할아버지 등이 굽었다
그래서 올라갔다.
쌓인 눈 파헤쳐 단단하게 흙 다지며 척추 마디마디
할배 머리 다 셌네, 귀 너머 언저리 목덜미에 달이 걸려 있어서
빌었다.
미안하다. 빈대 같은 나라
생각이 너무 많고 지구에 내가 너무 많고 그것은 사람은 또 아닌, 그래, 찌꺼기. 방 안이 나로 찬다. 비좁고 거름망도 없게
터진다. 세계가 수백 번씩
태어난다. 잔재로

"어이, 아재 꼼꼼히 좀 쓸어 담으소."​

잠시나마 조용해지는 거리 골목 골목
길마다 회벽에 물 자국이 남았다.
가만두자, 빛이 훔쳐 갈 때까지.
------------------------
읍면리/엄시연

나는 흑단색 치마보단 다홍치마
택 떼고 환불 불가
늘어진 방
이불 덮어 재우고 나는 밖으로 바깥으로 외벽으로 나돌다가
짝 누굴 닮아 불량하게 싸돈다고 한다.
품평서 같았다. 누군지 모를 사람을 향한
비명이 사방으로 튄다. 벽에 부딪힌다. 빵이 퍽퍽하다. 싸구려 욕과 함께
그것마저도 얼마 못 갔다.
품행을 망친다는 이유로 매점 운영이 중단되어서
끈 떨어진 슬리퍼. 질질 끌면서 걸으면 좀 더 신을 수 있다.
강물 끝 거슬러 올라가서 호숫가.
6명 중 3명만 남았다.
아마도 반은 죽었다. 나머지도
덜 떨어진 이성 애들과 똑똑한 척하는 동성 애들, 어깨 위 그을음
수세미로 문질러볼까. 영수증에는 네 이름
마지노선은 10만 원. 나에게 그 이상 쓸 값어치는 없고
사치하면 귓불 잡혀 끌려간다.
화장실에서 잘린 머리카락과 생식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내가 다섯 명 정도 누워 있을 만한 방.
가득 채운
수천 개의 촛불이 한 번에 꺼진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아무 일도.)
일탈이라고 해대는 게 술 담배 여자 남자 우습다.
손톱 멀쩡할 날이 없네.
술은 이렇게 따라야 한다.
병을 잡고
손목을 받치고

매끈한 그립, 필드 위에 선 나
투수 겨냥하며 홈런을 노렸다.
----------------
주사/엄시연

내 별명은 얼쩡이.
어디든 쉽게 얼쩡대다가 돌팔매질 몇 번 날아오면 없던 일처럼 후다닥 잘 도망가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나름 전문성도 있고요,
너는 그 나이 먹고도 아직 그렇게 사냐 욕도 먹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구질대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에요.

대작 좀 해주라.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평소에는 먹지도 않는 술을 시켰지 술만 시켰어 36만 원이 넘게 나왔고 네 말소리보다 빈 병 달그라대는 소리에 신경 써야 했어.
화가 난 네가 언제 돌변해서 소주병 들고 내 머리 내려칠지 몰라서
술병은 밑이 아닌 목으로 내리쳐야 빨간 줄 안 그인다는 사실까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언제든지 너는 날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어.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부터 네 세포가 창조를 시작하기 전부터
유전자 쫓아가면 알 수 있는 일이었지.
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동네의 유명한 폭력꾼이었고 나는 타고난 네 밥이었으니까
목욕탕에서는 발라당 넘어지고 동네 축제에서는 게다리 흔들고
사람들은 좋아했는데 너는 이게 웬 망신이냐며 도망 다니곤 했지
딱히 운명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우리 같이 평생 살아야 한대 사이좋게 지내자며 화해가 꽃말인 개망초 찾아 건네도
이런 걸 내가 어떻게 데리고 살아
손 잘근잘근 짓밟으며 린치했어.

​구멍가게 민 씨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복순이를 자주 걷어찼다. 복순이가 미련하게 밥그릇을 핥아서 모르는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어서 할아버지의 바지에 얼굴을 비벼서 털이 묻었다는 이유로 복순이는 자주 낑낑대면서도 할아버지를 쫓았다.

​어쩌면 개도 폭력을 사랑하는 것일지 몰라.
나 말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뚫어지게 타인을 쳐다보면
스티커가 떼어지듯이 인지와 시야가 분리되고 차원과 내가 이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내가 취했나보다 술도 없이 미안해 그만 얼쩡댈게.

​술만 깨면 금방 돌아간다. 원위치로.
-------------
몽고반/엄시연

나의 방에는 잉어가 있다. 아비가 고아 먹으려고 품을 들여 사 온 것이었다. 하나코, 하고 부르면 뚝뚝 흐르는 눈물방울. 어느 날은 상서로운 황금빛이었다가 어느 날은 비루먹은 흙색의 하나코. 너는 바다를 알지 못한다. 아비는 효자가 되지 못하고. 어미는 그 겨울날로부터 백 밤이 지나도록 보지 못했다. 하느작한 꼬리 동백꽃의 하나코, 뻐끔대며 너는 나와 마주 앉아 담배를 피운다. 방 안의 이백오십 센티 거대한 하나코, 언니가 어미를 동생이 아비를 닮아갈 때 하나코는 하나코로 남았다.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글을 읽는다.
사이에 좀벌레를 죽였다.
뒤돌아보라는 이름의 책이었다. 소년은 금붕어를 키웠다.
바구니의 부레를 칠칠맞게 흘렸다. 이어지는 물 자국.
아픈 배에는 고양이를 올려두었다.
아랫목이 차가웠다.
너는 나에게 솔직해야 해.
데이트 장소로는 정육점이 딱이다. 방혈 박피 적출 모두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곳은 그만큼이나 뒤돌아보기 좋은 장소. 여기요 나 한 근 잘라주세요. 푸주는 진실의 입을 대신한다. 위 위시 유어 메리크리스마스, 잘린 손이 연일 문전성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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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시연 / 2002년 경남 진주 출생. 계원예술대학교 애니메이션과 재학 중.
                2024년 《현대시》 신인상 당선. 주소 : 경기도 의왕시.

심사위원 : 원구식 오형엽 김언 안자영 양순모

      ―월간 《현대시》 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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