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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여는세상] [2018년 시로여는세상 신인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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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50회 작성일 2025-03-05 20:47:41 댓글 0

본문

항성/박윤서 (외 4편)

  작년 초여름엔 직사각형 액자 속 꼿꼿한 남자가 있어 나는 발길을 붙드는 그림처럼 뒷걸음질 쳐 다시 돌아오곤 했다. 반년이 흘러 겨울에 눈이 내렸다. 눈은 거울처럼 햇빛을 반사해 좁은 내 방을 구석구석까지 환하게 밝혔다. 거울 조각이 내렸어. 아니아니, 눈이 내렸어. 일어나봐. 그는 일어나자마자 뜨지도 못한 눈으로 두 팔부터 벌렸다. 나를 안았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대. 항성도 아니고 행성도 아니고 지구 주위만 맴맴 도는 위성이라서 햇빛을 받아야 비로소

  어두운 밤도 낮같이 밝히는 달님이 되는 거래. 나는

  눈을 달이 기울면서 흘린 부스러기들이라고 생각했어. 먼 우주를 지나 지구에서 여행을 마친 눈송이. 첫 눈송이. 지상에

  맨 처음 떨어진 눈송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프진 않았을까. 아마

  뼈가 부러졌을 거야.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눈송이의 뼈가 산산이 조각조각 흩어지면 그 위에 다른 눈송이가 내려앉았을 거야. 솔솔. 펄펄. 너무 따뜻해서 녹아버렸겠지. 그렇게 껴안아 주는데

  따뜻해서 죽을 지경이었겠지.

  오늘은 그가 나의 흐트러진 뼛조각을 맞춰주었다. 그에게는 현미경이 없는데 맨눈으로도 뼈를 볼 줄 알았다. 눈송이처럼 솔솔 펄펄 내려앉았다. 쌓였다. 나는 지금 우는 게 아니야. 따뜻해서 녹고 있는 거야. 그 뒤로는 손을 잡고 아무도 안 밟은 곳을 골라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의 발자국 옆에 달처럼 맴도는 내 발자국.

  오후 세 시의 시침과 분침 사이에 그가 있다. 혀 밑에 웅크리고 있다. 분주한 남자가 발자국의 눈을 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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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일은 쓰지 않는다/박윤서

무심히 넘겼던 노래를 다시 들으며 무심코 울어버렸을 때
어둠을 뚫고 서울로 진입하는 지하철 끝 칸에 혼자 앉아있을 때
직선과 직선이 만나는 곳에는 필연적인 모서리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연락이 닿지 않을 때
인터넷 신문 사건사고란을 훑어볼 때
세상에 단어는 많지만 나의 단어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런데도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처럼 간절해질 때
호두알을 깨던 망치를 빼앗아 머리를 내려치고 싶을 때
세상이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낄 때
그런 부채의식이 몸살처럼 가득 차오를 때
손가락이 다섯 개인 게 가끔 낯설어질 때
그보다도 낯선 것은 내 이름임을 생각할 때
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을 좋아하고
울리지 않는 핸드폰 붙들고 흘러가는 새벽을
손톱의 모든 잔물결을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빨래가 며칠째 두 팔을 벌리고 굳어가던 날
말도 못 하는 병신인 데다 말도 못 하게 병신이라고 소리치다가도
그래도 남의 인생을 훔쳐다 시랍시고 쓰는 저런 도둑놈보다는 낫지 않느냐며
화해하기가 무섭게 잠들어버릴 때
내가 나를 그렇게 알아갈 때
지금도 나는 머리를 달달 볶은 아줌마가 되어도 핑크색 립스틱을 사 모을 거고
그런 이야기를 부끄럽지도 않게 내 입술로 써 내려가는 중이고
세상에서 내가 절대로 훔칠 수 없는 나의 인생은 계속해서 요긴하게 쓰일 작정이므로
그런 일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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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호수/박윤서

밑바닥에는 아직도
주민들이 밭을 매고 집을 짓고 산다는 이야기가 있는
백이십삼 미터의 댐

햇빛에서 살아남은 이슬 한 방울이 그 위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세상은 온통 물바다가 될 것이라는
전설 같은 예언이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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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기억/박윤서

  시골 할머니에게 마음의 병이 있었다는 사실은 넷이나 되는 자식들조차 장례식장에서 알았다 서울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바늘로 스스로를 찔러대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걸핏하면 엄마가 얹혔다 가족력이었다

  내가 서너 살이었을 때 우리 가족이 수원에서 살았고 아래층엔 몸이 아프지만 엄마에겐 다정했던 두 남매의 엄마인 아줌마가 살고 있었다는 얘기들은 죄다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된 것들이지만 손에 기다란 파리채인지 뭔지를 들고서 달려드는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엄마와 안방 침대로 풍덩 뛰어든 나를 하얀 이불 속으로 숨겨주던 아빠와 기어코 나를 끌어내려던 엄마의 기억은 교과서에서 오려낸 삽화처럼 선명하다 그 집은 곰팡이가 너무 피어서 엄마가 기겁하며 이사를 가버리고는 영영 돌아가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엄마, 아직도 가끔은 그 집으로 돌아가 쥐똥 묻은 것 같은 이불을 들치고 파리채로 엄마를 후려치고 싶어 그러나 마주 앉은 엄마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나보다 더 커진 나는 엄마의 등을 두드리고 엄마는 구역질처럼 울어버리고

  엄마나 나나 사람을 중력 삼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고 내일이라는 것도 잠들기 직전 먹는 한 무더기의 알약처럼 삼켜지고 떨어지고 내려보내는 것이겠지만

  이 좁은 방 한 칸마저 습기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건강한 폐가 갖고 싶어지고 등 떠밀려 내쫓기고 싶은 밤

  밀린 설거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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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자 외 출입금지/박윤서

당신은 지금 구 킬로짜리 드럼세탁기에 머리를 넣고 있다
당신은 십 분이 빠른 어제 아침 겨드랑이가 구멍 난 푸른 티셔츠만 입고 꿈 없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당신은 모든 경의선 기차가 야경 속으로 다 사라질 때까지 성대가 터지도록 말을 걸거나 소리를 지를 것이다 마포대교를 두 발로 건너올 내일 밤

당신은 글이 무섭다 했으니

자두 맛 사탕을 양 볼에 물고서 몇 번이고 읽어주지

당신은 세상에서 귀가 가장 크다는 강아지를 준비해 주길

 

당신은 질투만큼이나 어렵고

당신의 갈색 베개만큼이나 푹 파였다

“그럴 바에야” 굽기 직전의 비스킷이 되자

아직 완성되어버리기 전으로

 

사랑이 진부하거나 혹은 어제 입었던 옷만큼만 꺼려진다면

혀가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불러 주리라 등허리의

이름 없는 우물에 고인 자음과 모음을 퍼내며,

 

당신

구석진 어금니 위로 흐른 한 방울의 침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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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서 / 본명 박정은. 1993년 경기 출생.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8년 하반기 《시로여는세상》신인상 당선.

| 심사과정 | 심사위원 : 이영주(시인), 김상혁(시인)

 * 이영주 시인의 심사평(pp. 207~209)과 김상혁 시인의 심사평(pp. 210~212)은 생략합니다. 

  하반기《시로여는세상》신인상에는 170여 편의 원고가 접수되었다. 기 당선작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매우 실험적인 시도와 신선하고 발랄한 문체들이 이목을 끌기에 충분해서 예심을 보는 내내 이국에서 새로운 음식을 접할 때처럼 흥미로웠다. 재미있는 것은 응모자들의 나이와 성별을 가늠하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 매복되어 있는 특정한 지명이나 시대적 언어습관을 가지고 유추해 보았을 뿐이며, 그것은 거의 적중했다. 시적 언어구사에 동원된 단어와 문장은 천금과 같은 것이어서 단어 하나라도 허투루 소비하기에는 억울한 일이다. 물론 이것은 시적 도구로서의 언어가 주체적 사유의 일관성에 흠결을 초래하는 경우에만 그렇다는 얘기다. 모든 단어와 문장은 스스로 발화되는 존재의 이유가 분명히 있다. 다만 특정한 의상만이 그것들을 결정하고 성실하게 받아들이며 공중에 솟구쳐 폭발할 수 있는 것이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가지고 심사위원들은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쁜 징조이기도 하고 동시에 좋은 징조이기도 하다. 매끄럽고 세련된 ‘잘 쓴 작품’보다 원석에 가깝지만 좀 더 ‘미래가 있는 작품’이 당선되었음을 밝힌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시는 흔들리며 이동하는 악랄한 사기 같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참여해 주신 분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예심을 통과한 분들의 작품 제목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편집부)

    강〇〇 「그곳으로」 외 9편
    김〇〇 「필라멘트」 외 9편
    김〇 「일방통행」 외 9편
    심〇〇 「오늘도 나는 36.5도처럼 굴러다녔다」 외 9편
    엄〇〇 「위험한 동네」 외 9편
    염〇〇 「읽는이에게 제목을」 외 9편
    윤〇 「수선화는 피었지만 난 쓸쓸해요」 외 9편
    이〇〇〇 「택시 공업사」 외 9편
                                              ⸺가나다 순

 ◆  (…전략…) 최종적으로 윤선의 「수선화는 피었지만 난 쓸쓸해요」 외 9편과 박윤서의 「항성」 외 4편을 사이에 두고 고민을 했다.

  윤선의 작품은 정서의 폭발력이 눈에 띄었다. 행간 사이사이를 차근차근 밟아 나가면서도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감성의 지점들이 매혹적이었다. 또한 어조를 풍부하게 살리면서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 가는 장점이 돋보였다. 하지만 투고된 모든 작품이 어조를 살리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작품 각각의 개성들이 묻히는 역효과를 불러온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모든 작품들이 한 가지 문체에 집중된다는 것은 시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데 오히려 한계를 느끼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민해 보시길 바란다.

  박윤서의 「항성」 외 4편을 신인상 당선자로 선정하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박윤서의 작품들은 긴 호흡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인다운 패기가 눈에 띄었다. 또한 자신이 선택한 시적 오브제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유연성이 흥미로웠으며 이 모든 것들이 현실을 바탕으로 끌어 올려진 것이어서 더육 소중하게 느껴졌다. 또한 경험치 너머의 지점까지 뻗어 나가려는 시적 인식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언급해야겠다. 물론 거칠고 과잉된 정서가 조금 더 예민하게 다듬어져야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앞으로 그러한 부분들은 현명하게 잘 헤쳐 나가리라 믿는다. 시를 정성껏 세공하는 과정은 박윤서의 앞으로 남겨진 숙제일 것이다. 이 신인이 보여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해 본다.    (이영주 시인의 〈심사평〉 부분)

              ⸺계간 《시로여는세상》 201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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