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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2022년 파란 시인상]여름방학/마윤지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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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58회 작성일 2025-01-02 15:39:26 댓글 0

본문

여름방학/마윤지

너 매미가 언제 우는지 알아?
 
동트기 전부터 아침 먹을 때까지 우는 애가 참매미다
아침부터 낮까지 우는 매미는 말매미고
 
에스파뇰 공부를 한다고 했지
우리는 마당에 앉아서
따르르르 아르르르 한참 연습했다
보쏘뜨로-스 보쏘뜨라-스
 
너무 뜨거운 날엔 옥상에 물을 뿌렸다
크고 넓은 나뭇잎
일 층 대문 밖 골목
옆집 뒷집에까지 몰래 그렇게 했다
 
너넨 울면서 새도 쫓고 더위도 잊는다고 하던데
아니야 매미는 떨면서 소리를 내는 거야
 
가득 찬 고무 대야
아주 느리게 헤엄치는 날개들
 
불이 너무 뜨거워 불 속에 손을 넣었다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했다 *

 ---------------------------------
 
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마윤지
 
우리는 농담을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나는 평생 그런 걸 해 본 적이 없어
손에 땀이 났습니다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여기에 왜 왔나요?
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말해 보세요
 
돌아가면서 농담하는 시간인가 봐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옆자리 앉은 사람이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로
우리가 어떤 농담을 하는지 보러 왔다고 했습니다
 
 ----------------
당신 차례가 되었습니다/마윤지
 
 
안동에서는 조문객들이 절을 할 때마다
 
어이 어이 어이 어이
곡소리를 낸다고
 
그러면 상주와 가족들이
 
어이 어이 어이 어이
곡을 받는다고
 
사흘 장이 끝날 때면 목이 아파
아무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했습니다
 
선생님이 창문을 반쯤 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서울에서 밤을 보내며
흠흠. 목을 가다듬고 소리 내어 말해 봅니다
 
개구리가 저기서 맹하면 여기서 꽁한다
그게 맹꽁이다
 
날이 무더워지기 전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초여름
 
장독대 안에는 분명 매실이 있습니다 *
 ---------------
 
생활과 비생활/마윤지
 
공용주차장에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이제 막 서늘한 바람이 부는데 언니는 짧은 바지를 자주 입었다
 
비가 많이 왔다 앞을 볼 수 없어서
건물 사이를 잇는 다리 밑에서 기다렸다
 
손 안 놓을 거지
그래 그만 물어봐
 
언니 방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다
포스터가 말려 있고 책상 서랍엔 일기가
문제집 앞 장엔 함께 과외받는 친구들이 별명을 적어 꾸며 놓은 낙서
담배를 몇 번 태웠다는 것
가끔 학교 사물함에 쓰던 세 자리 비밀번호 자물쇠가 문에 걸려 있었다
 
뭐야 나 진짜 화났어
자전거는 이렇게 배우는 거야
그건 그냥 거짓말이야
 
언니는 이제 충주에 산다
강줄기가 있고 민물고기 낚시터가 많은
무릎이 자주 저리다면서 오랜만에 같이 자기라도 하는 밤이면
발바닥을 주물러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어색하고 어리둥절해지는 곳
 
얼마 지난 미래에 저울의 영점을 두는 방법이나
의자 다리의 나사를 겉돌지 않게 조이는 법
슬프지 않게 안부를 전하거나 칼을 가지런히 꽂아 두는 법
입술이 두꺼웠나 그림을 잘 그렸나 빨리 떠올리는 법
구름만 보고도 태풍 읽는 방법을 알고 싶어졌다
 
사실 자전거를 어떻게 타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고
 
언니가 없는 사진들 언니만 있는 사진들
 
작고 얕은 그릇에 우유와 으깬 과자를 섞어
골목의 쓰레기 더미 아래에 놓을 때
숨을 고르며 우리가
같이 있었다는 것 정도만
 
탄금호 수류를 따라 서울에서 이어지는 길
송전탑이 들어서고 있었다 *
 
 -----------------------
폭염/마윤지
―충주
 
강에서 낚시를 하던 날
마을에 불이 났다
큰불일수록
혼자인 사람에게 가서 붙는다고
 
미끼를 몇 차례 다시 끼우며
모든 초록색과 모든 갈색으로
빛나는 잉어를 보았다
 
불이 자꾸만 강이 되었다
바다보다 강이 깊다는 말을 자주 떠올렸다
 
죽은 남자가 누군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혼자인 여럿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찌는 주저앉을 때 부르르 떠는 모양
 
조용한 강가
나란히 죽은
여름의 잉어 떼
 
햇빛이 느티나무 아래
갈라진 몸을 안고 오래도록
서 있다 *
 
 ----------------
괴산에서/마윤지
 
사람들은 산자락에 구덩이를 파고 살았다
슬픈 일이 있을 땐 울었다
 
아주 어리거나 아주 아팠다
 
퇴비 썩는 냄새가
오래된 흙의 틈새에 묻어 있었다
 
건넛마을이 불에 타며 반짝였다
 
곧 새 치아가 날 거야
어떤 기도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지난날 꿈에서 본 공터
과일 껍질로 만든 장난감 배
운동화 밑창에 붙어 있던 이파리를
땀이 식을 때까지 중얼거리며
 
구덩이 속에서 손을 잡았다
 
늦게 자면 키가 줄어든다고
물어본 적도 없는 걸
먼저 묻힌 우리가 이야기해 주었다
 
어제와 오늘은 더 작은 구멍 속
 
심장을 심은 자리
 
텅 빈 밤 내내
돌들이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
 
 --------------

무릉리 무릉도원집/마윤지
 
이 집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죽는 생각을 했다
 
우울 속엔 땅콩버터와 유람선
 
가까운 곳엔 귤나무와 돌고래
 
눈물을 많이 흘린 날엔 잠을 잘 잔다
 
한라산 등반 코스 중에는
한라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길이 있다
 
산에서 평지를 생각하고
섬에서 육지를 생각해
 
해가 집의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 나가는지
지켜보게 되는 일
 
파도와 바람
몸살을
 
구분하는 일
 
그만둬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찾아와 집을 보겠다고 한다
 
몇 분이 사십니까
조금 많습니다
 
몇 분이 사십니까
삼백 명입니다
 
무얼 하시렵니까
옷만 갈아입고 가겠습니다
 
어디에나 창문이 있어 열어 두었다
 
멀리서 내가 죽었다는 말을
꿈에서 자꾸만 들었다
 
겨우 시를 읽고 겨우 돌아누워
 
그림처럼 그 집이 좋았다 *
 ---------------
 
석모대교/마윤지
 
어느 식당에서
밥공기에 주문을 걸어 준다
입술을 묻고 조용히
 
오래된 소금밭
오래 반짝이고 어둡고 알갱이가 되는
노을
쓸려 가고 몇이
손에 박혀 따가운
천 년이 된 그런 소금밭
 
다리를 건너는 동안
영원히 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서울에 심어 놓고 온 대파 생각을 한다
 
잘 자라라 잘 솟아라
 
이 세계에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사람에게
주문을 건다
 
오늘 당신은 아프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습니다
 
강화도 천일염은 단맛이 많이 난다
사람들이 한길로 나갔다가 한길로 들어온다 *
 
--------------
동지(冬至)/마윤지
 
십이월에는 흐린 날이 하루도 없으면 좋겠다
그런 약속이 있으면 좋겠다
 
놀이터엔 애들도 많고 개들도 많으면 좋겠다
살도 안 찌고 잠도 일찍 들면 좋겠다
조금 헷갈려도 책은 읽고 싶으면 좋겠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차표를 잔뜩 사고 안 아프면 좋겠다
 
삼십만 년 전부터 내린 눈이 쌓이고
눈의 타임캡슐 매일의 타임캡슐
다 흘러가고 그게
우리인가 보다
짐작하는 날들이 슬프지 않으면 좋겠다
 
묻어 놓는 건 숨기는 게 아니라 늘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지
그 무엇보다 많이 만져 보는 거지
나중엔 번쩍 번개가 되는 거지
오렌지색 같은 하늘이 된다 맛도 향기도
 
손가락이 열 개인 털장갑
이를 테면 깍지
햇빛의 다른 말이다 *
 
 --------------
해안순환버스/마윤지
 
동굴이 많은 섬에 가면
옷이 젖고는 한다는데
 
삼십 분 간격이야
어디에서나 다시 탈 수 있대
 
이민지나 전민지가
연등에 자기 소원을 묶을 때
 
이 해안의 끝에서 끝까지
허공의 손바닥들이 뒤집히며
차르르 차르르르
 
기사는 친절하고 심심한 사람들
 
사월에는 음악회를 해요
소리가 멀리까지 울리겠죠
 
이즈음 건너편 섬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 울음이 들린다고도
 
동굴 천장이 닫히면 검은 모래 해변까지
파도가 높게 친다
 
바람 이후에 바람
바람 다음에 바람
 
바다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동굴이었다면
믿었을까
 
아빠와 동생이 물에 발을 담갔다
엄마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니
 
섬 뒤쪽을 보세요
등대까지 걸어가면 더 잘 보인답니다
 
소 뒷다리 같은 모양이죠?
그렇다고 해 주세요
 
아니다
어둠 속에서 잠을 자는 사람
 
그릇 돌담 메아리
 
희고 하얀
 
너도 봤잖아
너도 봤잖아
 
영원은 물빛
 
오래전에 출발했다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요
다음엔 하루 묵고 가세요 *
 
 -----------
천사가 아닌/마윤지
 
안녕하세요? 저예요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겨울에게도 안감을 덧대면 어떨까요
조금 두툼하게요
세상 모든 첨탑과 내리는 눈 위에
달걀프라이를 얹어 볼게요
 
사람들은 왜 높은 곳에서 보는 작은 불빛들을 각별해하나요
자세히 보면 징그러울걸요
어디가 팔꿈치고 손가락인지 모를걸요
 
아 아름다운 거군요
너무 사랑하지는 않겠습니다
너무 아프고 싶지는 않거든요
라고 말하는군요
 
아주 귀여워해도 마지않을 존재는 안감이 필요한가요
지금보다 조금 더 폭신한 꿈이어야 좋을까요
 
창밖엔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종착지들 하양들
 
흐린 날입니다
바늘에 실도 끼우지 못할
 
한사코 겨울의 풍경
 
거리에서는 저마다
그릇에 첫눈을 가득 퍼 담아 주면서
 
이걸로 과일도 사 먹고 옷도 지어 입으렴
귀한 것이니 다른 것은 만들지 말으렴
 
그래도 저는 감히
 
오랜 밤 오랜 공터
이 세상에서 막 첫잠에 드는
헐벗은 슬픔이 누워 있다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 보기 위해 온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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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윤지
199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cucurumaj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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