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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중앙] [2013년 문예중앙 신인상] 고양이 관념론/신두호 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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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42회 작성일 2025-01-09 23:03:02 댓글 0

본문

고양이 관념론/신두호

 새하얀 고양이는 하얀이라는 속성을 기른다
 하얗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닌 고양이는
 네 발을 모으고 골몰하는 7월의 구름 11월의 열기구
 쓰러지는 나무 곁에 아무도 없었다면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숲
 종적을 지우며 흩어지던 발걸음이 멈추고
 전화벨이 울리면 나는 전화기만 확신한다
 거실의 형태와 색채는 차원을 먼지로 기록하지만
 공간을 점유하려는 사물의 성질은 믿음의 영역
 하얀이라는 속성이 빛의 털실 뭉치에서 새어 나온다
 정오를 떠다니는 음모들은 식별되지 않을 만큼 가볍고
 고양이 없는 그림자들에 대한 실마리는
 해진 주머니에 있다 버려진 지팡이의 매끄러운 손등 위에도
 늘어진 음성처럼 더디게 퍼지는 초침 속에서
 희미한 벽들을 선동하며 어슬렁거리는 방
 목소리는 기억한 입술을 잊기 위해 건너오지만
 꽃병과 꽃이 서로에게 무능한 감정이듯
 어둠 속 검은 원뿔의 희미한 테두리들을 가진
 나는 근사한 걸음걸이에 빠져든다*
 곡면을 제도하듯 차오르는 감정들의 기하학
 향기의 모양을 간직한 꽃잎이 실재에 유일한
 자신의 꽃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고양이는
 아니다 피어오르는 향이 붉은 부채를 펼쳐 보이는 어디에도
 하얗게 지워지는데 아무것도 아닌 숲
 한데 모인 네 발을 감추는 꼬리가 남는다
 네온사인 파자마 가스파초 계피향
 정지한 해변을 물들이는 창백한 개념들과
 사라지기 위해서만 골몰하는 과정이
 그리는 붓에서 찾는 붓을 발견한다 백사장이
 태양을 등진 고고학자의 입에 견고한 무덤을 만들고 있다
 고양이 없는 꼬리의 뼈가 막 드러나려는 순간에
 ————
  * 폴 발레리,「시의 아마추어」에서.
 
 ————————————————
 탁상공론의 아름다움/신두호
 
 우리는 탁상 위에 턱을 괸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것들이 떠오른다
 라운드 테이블 위로
 
 예를 들어 내가
 젤라틴을 부정한다면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면
 열매는 가로수 이마들에 달라붙고
 아이스크림과 혓바닥의 유비는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노조의 대표단은 사측의 입장에 맞서 무한한 궐기를 양보하므로

 투우의 쟁기질과
 쟁취의 입씨름이
 윤리적이다
 탁상에 있어서 늘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측 대표의 금이빨은

 마침내

 어금니를 간다
 밖에 매달린 누군가는 창을 닦는다
 아마도 깊은 잠에 소환되었는지
 탁상 위 아이스크림은
 젤라틴으로 변심한다

 진화라는 단어에 대해 희비가 엇갈린다
 급한 불은 일단 끄고 봅시다
 우리에겐 연중무휴 가동되어야 할 공장이 있지만
 젤라틴은 누구의 취향에도 타협하지 않고
 주사위처럼 구르는 단어들이

 혓바닥의 유무를 의심케 한다
 각자의 의자는 도무지 융통성이 없으므로
 모두의 원탁이 유연해져야만 한다
 
 그들만의 허황된 이론에 골몰하는 한 연인은
 시간의 정물이 된 감정들을 가지고서
 탁상 위에다 주사위들을 던진다
 형태 속에서 각설탕의 구조는 은밀하다
 
 라운드 테이블이 있는 어디로든 그날그날의 쟁점처럼 햇빛은 떨어진다 녹은 아이스크림이 솔직한 심정을 내보이고 연인의 혓바닥은 각설탕을 난도질한다 난항을 겪던 협상이 늘 결렬되지만

 탁상을 탓할 수는 없다

 탁상과 아이스크림과 혓바닥의 삼위일체 속에서
 누군가 젤라틴을 혐오한다면
 우리는 저마다 턱을 괸 채
 테이블 위로 떠오르는 것들을
 좋아한다

————————————————
 과일주의자/신두호

 오늘은 음식을 먹다 입 안의 살을 씹었습니다
 적어도 세 번은 먹는 일을 중지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이래야만 하는 걸까요
 
 반성을 반성하기 위해 거울을 봅니다
 치약은 형언하기 힘든 감정으로 흘러나옵니다
 이빨과 치아를 구분하는 일은 늘 막막하지만
 매일 밤의 양치질은 나라는 유물을 발굴할 수 있을까요
 
 결국 떨어진 것만을 주워 먹기로 합니다
 바닥에 대한 기나긴 탐구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홍시가 떨어지길 기다렸습니다
 조롱당하지 않기 위하여
 
 배반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함부로 총알을 소비하고 자신에게는 빈 권총의 방아쇠를 여러 번 당겨야 했던 오,
 가여운 트래비스*
 과일주의는 신념이기보다는 태도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만
 
 거울 속으로 누굴 초대할 수 있을까요
 과일주의자에게도 식단표는 필요한데 말입니다
 익은 열매들이 썩고 문드러져 떨어질 순간은 그럴싸합니다
 입안을 헹굴 때마다 씹혔던 살들이 저릿하게 아려옵니다
 하지만 어머니,
 역시 저는 바보였나 봅니다**
 ————
 *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 * 니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변형함.
  ————————————————
 
 버드나무들과
 
 
 
 너는 팔짱을 끼고 껌을 씹는다
 
 
 
 나는 원소주기율표를 외우다 관뒀지만
 
 24절기는 노래로 부를 수 있다
 
 
 
 가지들을 치렁치렁
 
 매달고 떠 있는 나무
 
 번지점프를 끝낸 사람이
 
 거꾸로 축 쳐져 있다
 
 
 
 우리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러 간다
 
 이른 아침에 만났지
 
 한 명은 금식 중이고
 
 한 명은 섭식장애가 있고
 
 한 명은 늘 소리를 내지르지만
 
 
 
 장애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아침엔 캘리포니아였지만
 
 태양은 어디로든 우리를 끝없이 배웅하고
 
 금문교 붉은 난간에 앉아
 
 해협의 물살을 내려다보는 사람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을 불러 세운다
 
 풍향계는 아무래도 소용이 없었지
 
 뒤집히면 날개로 도는 벌레는
 
 
 
 너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껌을 삼킨다
 
 우리는 각자의 스케이트보드에 올라탔는데
 
 우리의 고립이 이제 막 흘러가기 시작했는데
 
 
 ————————————————
 
 모텔 밀라노
 
 
 말갈기를 통과하는 바람들이 있어
 
 제자리를 맴돌던 떠돌이 개는 고개를 묻고
 
 광장에 어느새 모기발순하면

모텔은 빨강 밀라노의 초록

 

너를 만나면 두서가 없어질까 두려워

나는 수화기를 버리고 달아날까 하다

공중전화에서 개가 오길 기다렸어

마방진을 하자 욕조 안에 웅크리고 싶어져

 

소속감을 가지러 놀이터에 가곤 해

연기를 내뿜는 붉은 입술이 허공을 떠도는데

성 밸런타인 밸런타인데이의 알 카포네

꽃잎은 우수수 탄피처럼 우아하게

 

떨어져 걷는 연인들의 거리감은 놀라워

상대방의 불행을 염려하기도 하면서 희생에서 소명을 찾는 삶이란

뭘까, 당기시오라고 적힌 유리문 앞에 서면

밀고 보는데 방아쇠가 있어서

 

네 손바닥에 전해주려 했던 모래 알갱이들이

내게서 스르르 새어나가 오늘만큼은

온통 입자라는 생각들로 빛을 맞이하는 저녁

이유 없이 헐거워지는 불빛들을 기다려

 

때로는 뒷모습에서 서늘한 해골을 떠올렸어

네가 지금 이곳에 없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일까

싸구려 보라색 벽지 속을 산책할 일은 없겠지만

포로 로마노는 유적이거나 폐허이거나

 

모텔 밀라노는 초록이거나 빨강이거나

말은 어둠 속에 정지한 채 잠들어 있네

 ————————————————
11월/신두호

목요일만 잃는 달력들의 세기

 

세계는 최후의 두 사람과

각자의 자동차로 남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수단으로 기도합니다

생물들이 안개가 된 세계

투명한 보균자들의 공동체를

 

뿌리부터 썩어드는 가로등의 광원이

거리를 은닉하고 있습니다

목요일의 파릇파릇한 무덤들을

 

광장은 늘 최선의 중력을 요구하지만

허공을 빚어내는 건 안개의 몫이었습니다

쌓여 있던 모래주머니들만

철저하게 무너집니다

 

속눈썹들이 하나둘 떨어지는 장막 너머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차량

평행하는 선분의 끝에서 그대는 만날 것입니다

금속이 금속과 만나는 적막을 헤아리려

 

끝없이 허공을 주저앉는 낙하산이 있습니다

 

최후의 광원 하나가 두 사람의 차량을 비추어

안개가 되어가는 그들의 내력을 읽습니다

중력이 된 광장 안으로

연기가 검은 혀처럼 굳어갑니다

————————————————

요정 로열티/신두호

 

 

벽돌은 벽으로 만들었다

 

기체와 액체 사이에서 흐느끼는

나의 인형들

규정된 관절들

 

사그라지는 성냥처럼 그렇게 외면을 배제한다

 

없는 게 있는 것 같다는 상투적 환상을 가지고

부정만을 선언하기로

 

초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열매가 작아지는 과수원의 잿빛 딸들을 알고 있었지

칸트를 읽는 처녀들과

 

벌들

비모음들

밤의 순수한 불순물들

 

추락만 가능하다면

어디든 우물이 펼쳐지겠지만

반복으로 산출된 구름

집 없는 굴뚝에서 흘러나온다

 

초콜릿 케이크로부터 연역된 의자의 끝없는 내부

하얗고 시리고 암묵적이다

 

리듬은 춤들로 구성됐다

 

춤은 혀들로 촉발됐다

 

나의 금붕어는 죽어서도 떠오를 줄을 몰랐다

지느러미는 늘 수심을 궁리하지만

어항은 수족관에 있었다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잔디밭은 구름으로 만들었다

 

녹색 하늘의 언저리가 톱날이었다

 
————————————————
 

소화기論/신두호

 

 

1.

그 영화가 끝나자마자

아니 상영되던 동안에도

나는 계속해서 소화기를 생각했다

여자는 왜 남자에게

소화기 사용법을 물었을까

나는 교양인이라도 된 듯

나름 사색이라는 걸 한답시고 골몰했다

 

소화기란 무엇인가?

태어나고, 일하고, 죽었다는

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물음을 던진 것이었다

소화기를 찾아 헤맬 위급한 사태란

안중에도 없는 내 무사안일에 감사하며

새하얀 우주왕복선이 활주로에 내려앉듯

무중력에 떠돌던 그 빠알간 물체를

나는 생각 속에 착륙시킨 것이었던 것이었다

 

2.

내가 아는 한

예정되지 않은 불행을 믿지 않는 자들의 소화기는

늘 먼지에 뒤덮여 있다

이것은 불행에 대한 설명이므로 제외,

하고 뒤돌아보면

먼지에 뒤덮인 빠알간 손잡이에서

나는 가소로운 내 사색의 실마리를 하나 발견한다

‘움켜쥔다’

능동과 수동의 저울추 같은 묘한 이 말은

손잡이에 먼지로 상감되어 있다

 

소화기는 무엇을 움켜쥐려 하는가

소화기를 움켜쥐는 것은 무엇인가

예정되지 않은 불행을 믿지 않는 자들의

소화기 안에는 늘 시간의 분말이 쌓여 있겠지만

‘움켜쥔다’는 무엇인가?

소화기는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내게 묻는다

‘움켜쥔다’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무엇인가?

 

3.

가부좌한 승려의 몸에 불이 붙는다

그는 불타오르며 경을 읊었다

자기 자신을 움켜쥐고는 스스로 불이 된 몸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엎드려 흐느끼는 승려들 틈에서

소화기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
 

밤의 환/신두호

 

 

  밤이 되면 거리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도망가지 못한 어두움이 조바심을 늘어놓는 시간 내몰리는 데 일생을 허락한 자들은 껌을 씹으며 자신의 말들을 수거했지만 어떤 이들은 가만히 서서 비구름이 지나길 기다렸다 기형의 잎사귀들이 허물어진 담벼락을 뒤집어쓰고 어떤 가로등은 재채기를 하다 희미해졌다 누군가의 이 하나가 빠진 것이다 달빛 없이도 거리는 더욱 치밀하게 술렁였다 가만히 서서 구두를 벗는 그들의 입장은 스스로 해체되는 장미의 상황과는 달랐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은 길을 잃는 것보다는 유연했다 망치가 필요한 나사를 달래듯 당신들은 배회하는 거리를 다독여주곤 했다 비구름의 유언을 듣기 위하여 삭발을 한 자는 유일하게 우의를 입고 밤에서 나갔다 술렁이던 거리들이 내뱉어진 껌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두움이 붙잡은 자들을 관통하는 내세가 골목이 되어 활보했다 매듭지어진 그림자들을 세워두고 길은 어디로든 길들을 잃었다

 

 
————————————————
우의의 산책/신두호

 

 

비옷을 입고 그는 걷는다

버려진 텔레비전에서 잡음이 끓고

관절 꺾인 우산이 널브러져 젖는 밤

 

무성의 비옷 안에서 그는 그녀로 둔갑할 수도 있지만

폭우의 내부를 산책하며

스스로의 리듬으로 전진하는 비옷

그이거나 그녀는 지금 우의로만 존재한다

 

검은 구멍이 된 얼굴

소매 끝에 맺힌 물방울들은 쉼 없이 낙하하고

세계는 우의를 매 순간 두드린다

빗발 속을 통과하는 알레고리

공명하는 악기처럼 소리는 우의 안을 울린다

 

팽팽하게 펼쳐진 허공 없이

몰래 젖는 어깨도 없이 빗속에 거주하기에

텅 빈 거리의 여백을 그림자처럼 걷는다

 

하얀 불빛을 내세운 자동차가 얼굴을 비추어도

아무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언뜻 부르튼 맨발을 내보여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차에 치인다면

그림자로 누울 것이다

 

텔레비전이 음소거되고 쓰레기 수거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도로 위에

검은 우의가 버려져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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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

    _ 권혁웅

 

  아마존 강 주변에서 사용되는 마체스어에서는 시제를 나타내는 정교한 접미사들이 발달해 있다. 첫째 사건이 일어난 시점, 둘째 그 사건의 증거를 발견한 시점, 셋째 증거를 발견한 시점에서 지금 말을 전달하는 시간까지의 시점이 다르고, 그걸 전달하는 시간의 표현이 짧은 시간, 긴 시간, 아주 긴 시간으로 각각 나뉘어 있으므로, 말을 전할 때에는 3(첫째 시점에서 둘째 시점 사이를 전하는 세 개의 시간)x3(둘째 시점에서 셋째 시점 사이를 전하는 세 개의 시간)=9, 도합 9개의 접미사가 있게 된다. 방금 전의 흔적을 오래전에 발견했다와 오래전의 흔적을 방금 발견했다 사이에 일곱 가지 발견이 더 있는 것이다. 마체스어 사냥꾼들은 한 문장만으로도 사냥감에 관한 세밀한 정보를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시의 언어는 마체스어와 같아야 할 것이다. 사람마다 품은 세계가 다르고 돌아보는 세계가 다르고 내다보는 세계가 다르므로, 우리의 언어는 무수한 시제와 표현과 문체를 가진 복잡성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이번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응모된 작품을 보면서 다양성이 뿜어내는 황홀함을 접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최종적으로 다음 응모작들을 검토했다.

  조수아의 언어는 백화난만한 꽃밭을 떠올리게 한다. 화려하고 다채로웠으나 그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풍요로운 언어는 무책임할 수도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 말들이 감당해야 할 의미 이상의 것들은 죄다 인플레라는 것을 유념했으면 한다.

  이도미는 기꺼이 방황할 줄 안다. 세계를 편력하지 않고 시의 세계로 넘어오기는 어렵다. 그 점에서 「빵과 함께」처럼 비시적인 소재를 시로 주조해낼 수 있는 것은 좋은 재능이다. 시편마다 시선을 붙잡아두는 지점들이 강화된다면 무척 매력적인 시인이 될 것이다.

  이소연은 일상이 불현듯 불온해지는 순간을 잡아내는 데 빼어나다. 전상인 세상이 바로 그런 이상한 세상을 억눌려 얻어낸 것임을 폭로하는 것도 시의 임무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어왔다. ‘다른 이상함’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박민혁의 시를 내려놓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청춘의 순결한 환상과 그 끝에서 마주치게 될 환멸을 동시에 말하는 듯한 어조, 사소함으로서만 겨우 유지되는 잠언들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선배 시인들의 코스튬을 다 벗지 못한 정도의 작은 흠이 있었을 뿐이다. 어디서든 곧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신두호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줄을 따라가며 읽는 맛도 좋고 머물러 곱씹는 맛도 좋다. 시편마다 존재론적인 질문 몇 개를 뽑아낼 만큼 깊이를 품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응모자는 시행이 만들어내는 길이 대로(大路)가 아니라는 것을, 혼자서 걸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그 끝에서 신성한 비의 하나를 만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좋은 시인을 알게 되어 기쁘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본심에서 다루지는 못했으나 김문재, 최세운 등의 이름도 기억해두고 싶다.

 
  _ 조강석

 

  올해 시 부문에 투고된 작품들을 심사하는 데 작년의 두 배쯤 되는 시간이 걸렸다. 현격히 당선권에서 멀리 있는 작품들이 많지 않아서 우선 배제하는 데 애를 먹었고 그리고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에서 당선작을 고르는 데에도 심사숙고와 세심한 독서가 필요했다.

  올해 투고된 작품들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투고자 본인의 실존적 상황과 관련된 작품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즈음의 우리네 삶의 조건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중요한 것은 실존적 상황의 토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미학적 진부함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치장도 없이 곡진함 그 자체로 호소가 되는 시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본심에 오른 작품들의 경우 내용과 형식의 동시개변과 동시개진을 적어도 지향점으로는 두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렇게 우리 시는 또 다른 단계로 진행하는 중임이 명백하다.

  본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정지윤, 이재연, 최란주 씨의 작품은 투고된 작품 사이에 다소 편차가 있고 말의 절제가 부족한 점 등은 있지만 각자 개성을 지니고 있어 추후 주목을 요한다.

  본심에서는 이도미, 이소연, 박민혁, 조수아, 신두호 씨의 작품이 검토되었다. 발상의 참신함이나 안정된 문장 그리고 이미지의 대담한 생산의 측면에서 이들의 작품은 우리 시의 미래를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심사평에서 아쉬운 점들을 지적하는 대신 당선작인 신두호 씨 작품의 비교우위를 설명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이다.

  신두호 씨의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이미지-사유를 능숙하게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문장에도 힘이 있고 그런 문장을 운용하는 리듬 역시 작위적이거나 어색하지 않고 유장하다는 장점을 지닌다. 힘이 있는 문장이 매끄럽게 운용되는 것은 그가 거쳤을 오랜 훈련을 짐작하게 하며 신뢰를 더한다. 더욱이 작품에 담긴 사유 역시 가벼운 것은 아니되 그것이 개별 작품에서 구심력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지 않는 이미지들을 통해 개진된다는 것은 대번 눈에 띄었다. 그의 시가 등장과 함께 숙성기를 상당 부분 단축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당선을 축하한다. 그리고 근사한 시인을 또 한 명 소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벌써부터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고 싶다.


【 당선 소감 】

  (……) 읽어야 할 책들과 써야 할 시들을 우선 미뤄두고 잠시나마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못 미더운 제자를 여태 이끌어주신 분들이 없었다면 이 기쁨은 텅 비어 있었을 것이다. 처음의 습작시들에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고성만 선생님은 늘 너그럽고 예리하게 시를 읽어주시곤 했다. 시의 기초를 만들어주신 나희덕 교수님의 오랜 관심과 격려를 또한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시의 방향과 목소리에 대해 고민하도록 가르쳐주신 이장욱 교수님의 세심한 조언에 늘 감사한 마음이다.

  두려움과 설렘의 감정을 동시에 일깨워주신 심사위원 분들과 문예중앙 편집부에게 감사드린다. 서로의 글을 고민하며 더 많은 단련을 자극했던 문우들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적잖은 시간 동안 묵묵히 지켜봐주신 부모님과 가족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시에 다다르려 두리번거렸던 날들이 헛되지 않도록 써나가겠다. 매혹당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 신두호 / 1984년 광주 출생.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재학 중.

 
    —《문예중앙》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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