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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2022년 문학동네 신인상]폴리이미드 필름/이영은 /새로운 일/조도/서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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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01회 작성일 2025-02-13 21:09:3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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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이미드 필름/이영은

 은색 레코드판 위를 무용수들이 뛰어다닌다
 
 상처에도 투명해지는 흰 맨발을 하고
 베이더라도 오래오래 웃을 수 있는 허파를 기지고
 
 지빠귀가 잠시 앉았다 떠나간다
 
 부러진 날개도 다시 자라나는 숲에서
 스스로 깃털을 뽑아 서로의 입에 넣어주는 아이들
 
 마음에도 물웅덩이가 있다면
 모두가 그곳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는 것 같다
 
 울타리의 밖에서 안으로
 몰래몰래 뛰어들어오는 산양 무리
 허물어져도 괜찮은 폭설을 이끌고 온다
 
 빛 아래에서도 끝이 비치지 않던 절망
 녹은 눈 아래로 드러나 있고
 
 무용수들이 발끝으로 서서 턴을 돌 때
 숲 안팎의 경계가 불확실한 음계로 읽힌다
 
 문득 눈을 뜨면 발목이 부러져 있다
 
 접질린 발목 위로 이상하리만큼
 얇은 필름 한 장 떨어져 내린다
 
 저편과 이편을 모두 이을 수 있을 만큼
 기다란 필름이었고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이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처럼 읽히기 시작했을 때
 
 무너지는 숲이 숲을 돕고 있다
 
 ------
 새로운 일 /이영은
   
 이곳에서 우리 사랑을 했다고 설정해본다
 
 내가 알던 너를 해체해 새 사람으로 조립한다
 나의 마음에 들도록
 그러면 너는 금세 좋은 사람이 된다
 
 물품 가득한 연못에 얼굴을 담갔다
 심해에 익숙해지는 눈이 있대
 
 캄캄한 어둠 천천히 되짚으면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너와 나는 함께 마주앉아 사랑 아닌 증오도 아닌
 다른 이야기로 즐거워질 수 있는 사이가 된다
 
 들리지 않는 음파가 우리의 곁에서 맴돌았고
 늘어지는 긴 팔로 포옹했다
 
 가장 가까이 겹쳐진 순간에도 나는 네 모습을 볼 수 없지 멀어버린 두 눈으로만 감각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는데
 
 창틀에 몰래 올려두었던 선인장
 
 쪼개져 돋아나길래 잘 키우고 있다 생각했어 식물도감에서는 모두 햇볕이 부족해 벌어진 일이래 그러니 남향을 크 게 열어달라 투정 부리면
 
 열대 가오리의 모양으로
 웅크렸다 펼쳐지는 너의 자리
 
  과거를 주무르고 재조립하자 새로이 멀어지고 생겨나는 반경 그 끝에서 유리컵에 담긴 물을 무심코 엎질렀을 때
서서히 나타나는 여름의 자국
 
 그곳에 올라 발끝으로 땅을 딛고 춤을 췄다 말해본다 천칭이 기울 틈 없이 선명하게 비례하고 싶었지만

 누군가는 도무지 가벼워질 수 없는 풍경이었다
 어떤 기억들은 오래도록 불변해서 영원에 가까워졌다
-----------
조도/이영은

이게 내가 만든 새로운 그림자놀이야
그림자로 줄을 엮어 단번에 뛰어넘을 거야
 
한낮의 길이만큼
소년의 찢어진 그림자를 꿰매어주던 아이의 마음으로
 
새와 코끼리의 그림자를 상자에 주워담아 길게 늘어뜨릴 거라고
 
너에게 외쳤지만 너는 창밖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바깥에서만 도래해 오는 미래가 있는 것처럼
 
빛은 네 얼굴 위로 잔상을 남기고 가고 그건 가끔 상처가 아무는 속도보다도 길고 느리게 남아 있었다 아프지 않아? 물어보아도 멈춘 옆얼굴을 매만질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너
 
탁자 위의 허브는 조용히 죽어간다
유리창을 깨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구별할 수 없다
 
허공을 조율하면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도 같았는데
 
나는 잎사귀가 쓰러지는 방향으로 누워 끝과 끝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래를 부르고 그것을 녹음해 절대 끝나지 않을 돌림노래로 만들어
 
이제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
너는 그런 사실 따위 모르는 체하지만
가끔은 용서를 빌기도 한다
 
사과 같은 거 듣기 싫었지 잘못했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로 잘못된 일이 벌어진 기분이니까
필요한 건 그저 작은 눈빛과 가까이 오라는 어떤 손짓뿐이었는데
너는 정물처럼 변해 있다
 
외출했던 나의 희망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돌아온다

---------------
생동/이영은

 앞집 여자는 하루 세 번 화초에 물을 준다 무언가 정성스레 기르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점차 울창해지는 잎사귀

 빛은 어디에서나 섬뜩하고 완벽한 각도로 퍼져나가
 조용한 얼굴을 불타게 만들고

 여자의 하루를 전부 보지는 못한다

 골목 사이 유모차를 끌고 가던 부부는 어느새 손잡이를 놓았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갓난아이 하나가 미끄러져간다 아이는 순간 다른 공간으로 사라져

 어느 침엽수림 안쪽 까마득히 잠들게 되고
 무른 도끼로 나무를 베는
 부부의 모습이 보인다
 평생에 걸쳐 들여다보아도 읽지 못할 표정

 가끔은 추운 곳에서도 편지가 온다

 온 마음을 기울여 키워줬으면 해, 편지 봉투에서 쏟아져 나오는 브로콜리 씨앗 한데 그러모아 쥐어보면 손바닥 안에서 싹이 움트는 기분

 창밖에서는 가짜 웃음이 잔뜩 구겨지고 있다

 눈먼 수리공들 여자의 집 앞에 모여 서늘한 열매 주워갈 때 매미 껍질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제였던지 결국 기억조차 나지 않을
 중앙을 향해 징그럽게 모여들던 여름의 둘레에 서서

 성냥을 맞부딪치고
 작은 브로콜리 씨앗들 던져 태운다

 앞집의 여자가 세 번째로 물을 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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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재/이영은
 
  서은재는 반려 나무의 이름이다

  이대역 1번 출구 앞에는 동그란 나무가 한 그루 심겨 있다. 더없이 화창한 날에. 서와 은과 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걷다 나무를 보게 된다. 나무를 보았다는 것은 나무를 갑작스레 맞닥뜨렸다는 말과도 같다. 또는 단단한 우박이 차창에 떨어져 금이 가듯. 동그랗고 커다란 나무가 그들의 삶에 침입했다는 말과도 같다. 더없이 화창한 날에. 서는 그 나무가 마음에 든다고. 앞으로 동그랗고 커다랗고 높은 이 나무는 자신의 반려 나무라고 한다. 반려 나무? 서는 이 나무를 오랫동안 돌보지 않을 테고 어쩌면 이 나무가 이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을 텐데. 은이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구름은 완벽한 모양과 방향으로 흐른다. 모두가 동그랗고 커다랗고 높고 예쁜 나무를 위해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더없이 화창한 날에. 재는 이 반려 나무를 나눠 가지자고 말한다. 이름을 짓자. 이름을 짓자고. 반려 나무를 잊지 않도록. 우리의 이름을 따서 붙여주자고. 그래서

  이보다 화창한 날이 더는 없을 것 같을 때

  서은재는 반려 나무가 된다

  사실 서은재에게는 여러 가지 미래가 있었는데. 동그랗고 커다랗고 높고 예쁜 서은재는 어느 날 작은 트리가 되어 크리스마스 전구를 달아. 연인들이 아름다운 빛을 깎아 먹게 할 수 있었고. 오래된 괘종시계가 되어 시계추가 움직일 때마다. 바람을 느끼며 흔들리던 자신의 나뭇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토끼가 뛰어넘는 흰 울타리가 되어. 귀퉁이부터 색이 지워지고 닳아갈 수 있었다.

  서와 은과 재는 나무를 지나치며 걷는다. 겹쳐진 손에는 빼앗은 하나의 미래가 들어 있고. 그들이 반려 나무를 잊거나 잊지 않거나 어차피 서은재는 쑥쑥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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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다음은 알 것 같다가도 알 수 없어지는 것들의 목록이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곳에서 호명되었을때의 기분. 한쪽으로만 기울어지는 추. 알약을 제때 챙겨 먹는 방법. 갈수록 넓어지는 옆. 좁은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기는 일. 용서와 이해. 사람의 마음. 멈춰 있는 옆모습을 오래오래 쓰다듬는 것. 혼란과 혼곤. 잠든 맨발과 맞부딪히며 겹쳐지는 자세. 스스로 온전히 일어서는 힘. 단정하고 오롯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다리. 같은 방향으로만 자라나는 잎. 작은 입술. 여러 번 분열되고 이내 사라지는 너. 누군가 떠난 자리를 매만지는 시간. 그리고 사랑.

(…중략…)
 
배정원 선생님, 박찬일, 고광식, 오양진, 김다은 교수님, 마지막으로 제 이름을 호명해주신 세 명의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립니다.

▲ 이영은 / 1998년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22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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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 경위

  2022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에는 총 862명이 응모했다. 세 명의 심사위원은 두 달여의 시간 동안 총 6,006편의 작품을 나눠 읽고 각각 본심에 올릴 4~6명의 작품을 골랐다. 본심에서 논의할 대상으로 선정된 작품은 다음과 같았다.

      강태이, 「시로이 마카즈키」 외 4편
      김도현, 「섬광」 외 4편
      김수라, 「입체적인 상점에서의 시간」 외 4편
      김승학, 「코트」 외 4편
      김이림, 「머나먼, 지극히 먼」 외 4편
      박언주, 「식사를 합시다」 외 8편
      신정연, 「섬」 외 4편
      안수연, 「메콩 델타」 외 7편
      윤다미, 「가드닝」 외 4편
      이영은, 「폴리이미드 필름」 외 4편
      이이연, 「혼또와 유메」 외 4편
      이해준, 「오늘 돌려주려고」 외 4편
      장수현, 「골렘」 외 5편
 
  7월 말에 열린 본심에서는 이중에서 다시 5명의 작품을 집중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추천하여 토론을 시작하였다. 「머나먼, 지극히 먼」 외 4편, 「섬」 외 4편, 「폴리이미드 필름」 외 4편, 「식사를 합시다」 외 8편, 「혼또와 유메」 외 4편의 작품이었다. 세 명의 심사위원이 각자 추천한 작품이 달라서 의견이 쉽게 모이지는 않았다. 심사 과정은 차분했지만 또한 뜨겁고 진지하였다. 각자의 추천 이유를 듣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을 충분히 거쳤고, 그 결과 「머나먼, 지극히 먼」 외 4편, 「섬」 외 4편, 「폴리이미드 필름」 외 4편을 대상으로 재독의 시간을 갖기에 이르렀다.

  놓친 부분은 없는지 심사숙고한 뒤에 심사위원들은 각각의 작품이 가진 개성과 의미를 살피고 한계와 아쉬운 점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의견을 더 나누었다. 확실한 대표작을 선정할 수 있는지 여부만큼이나 응모한 작품이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일정 수준 이상을 확보하고 있는지도 토론의 중요한 주제였다. 이 과정을 통해 심사위원들의 의견을 좁혀갈 수 있었고, 마침내 「폴리이미드 필름」 외 4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전원이 동의하여 기쁜 마음으로 오랜 심사를 마무리하였다.

- 심사위원: 박상수(시인, 문학평론가), 백은선(시인), 이수명(시인)
 
|| 심사평(발췌) ||

  「폴리이미드 필름」 외 4편은 주제나 스타일의 측면에서 아주 새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행과 연의 진행 방식이나 제목과 본문의 건조한 긴장 관계 역시 익숙한 면이 있으며 불가해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주제, 또 어떤 구절에서 보이는 상상력 또한 다소 기시감을 준다. 그럼에도 이 응모자의 작품을 지지한 이유는 기성의 흔적을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소화하여 일정 수준 이상으로 새롭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폴리이미드 필름」의 경우 특히 이미지 구사의 정밀함과 완성도가 인상적이었다. 은색 레코드판 위를 자유롭게 웃고 뛰어다니는 무용수의 움직임이 “부러진 날개도 다시 자라나는 숲”의 기쁨으로 모두를 고양시키는 것 같지만, 눈을 뜨면 이 모든 것은 화자의 꿈 혹은 환상이었고 현재 화자는 발목이 부러진 채로 도망칠 수 없는 절망 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다. 그때 떨어진 “필름 한 장”이 저쪽과 이쪽, 꿈과 현실을 이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내고 있는데, 이어질 수 없고 결합될 수 없는 것을 연결하는 첨단 소재로서의 이 ‘폴리리미드 필름’의 존재감은 마지막 두 연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이/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해석되면서 설득력을 얻는다. 나는 이 만만치 않은 주제의식을 충분히 끌어안아 정밀한 이미지로 구현해낸 응모자의 솜씨에 설득당했다. _박상수(시인, 문학평론가)

  내가 가장 주목해서 보았던 시들은 「머나먼, 지극히 먼」 외 4편, 「입체적인 상점에서의 시간」 외 4편, 「혼또와 유메」 외 4편, 그리고 「폴리이미드 필름」 외 4편이었다. 이천 편 남짓한 시를 읽으면서 발견한 빛나는 시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 네 분의 시에 주목한 것은 모종의 경향성에서 벗어나 (불가능하더라도)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향성이란 ‘화자를 중심으로 안으로만 파고들어가는 시, 바깥이 없는 시, 언어의 운동성이 더딘 시, 환상성에 지나치게 기대는 시’가 아닌 시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긴 시들이 많았는데 내 입장에서는 길어야만 하는 내적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는지 좀더 꼼꼼히 들여다보며 읽게 되었다. 시의 언어라는 가죽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 고여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 읽었다. 시가 확보해야 하는 자연스러움이 분명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자연스러움은 시인의 태도 그리고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생겨난다. 심사를 하는 이 몇 달간이 내게는 마치 여행 같았다. 기꺼이 시의 영토를 헤매고 싶었다. 당선 여부를 떠나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_백은선(시인)

  「골렘」 외 5편은 대상의 동출을 통해 그 존재를 구성함으로써 시를 채우는 스타일이 눈에 들어왔다. 대상의 유효한 힘이 두드러지는 장면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시로이 미카즈키」 외 4편은 감각적이고 섬세한 화면 구성이 유려한 문장에 얹혀 아름답게 진행된다.나른하게 이어지는 대화와 독백은 시의 미려한 전개를 자연스럽게 이끈다.

  「코트」 외 4편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세심하게 고안하고 구성하는 장인적 기질이 돋보인다. 그 과정 속에서 사물과 상황, 인간의 관계가 뒤틀림을 통해 재조정되고 새롭게 발견된다.

  논의 끝에 「폴리이미드 필름」 외 4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이견이 없었다. 섬세하고 치밀한 문장,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언어 전개, 음영이 짙은 시선, 장면의 전환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잘 이루어진 화면 구성은 완성도 높은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적절한 거리로 인해 감정이 제어된 상태에서 묘사되는 이미지들은 다양한 포즈에도 불구하고 서늘하기만 하다. “허공을 조율하면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도 같았는데”와 같은 밀도 높고 담담한 문장들은 아마 오랜 제련의 결과일 것이다. 또한 “상처에도 투명해지는 흰 맨발을 하고/ 베이더라도 오래오래 웃을 수 있는 허파를 가지고” 무용수들이 뛰어다니는 것은 이 제련의 성격을 보여준다. “발목이 부러져” 버리기도 하지만 무용수들은 웃으며 춤을 추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부러진 발목이 아니라 얇은 필름 한 장에 비치는 춤이다. 모든 것을 “이을 수 있을 만큼/ 기다란 필름”의 출현에 축하를 전한다. _이수명(시인)

      ―계간 《문학동네》 202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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