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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의 시

기일-김애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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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629회 작성일 2021-10-13 12:45:38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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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일(忌日)
    김애리샤

벌레가 기어 나온다
꽉 다문 성경책에서 저녁이 번져 나온다

밥통과 그릇들은 모르는 얼굴이고
체크무늬 유모차는 뒷바퀴 아래에
오래된 그림자를 감추고 있다

오늘이 아버지 기일이니까

문단속 잘 해야 한다고
비밀번호는 비밀을 유지하고
앉은뱅이 현관문 손잡이는 겁이 많아
아버지는 겁쟁이였으니까,
턱을 지운 화장실 문이 친절하게 웃는다

애벌레 몸통 같은
형광등과 식탁과 의자들이 꿈틀거린다
방은 쉰내를 풍기고
휠체어는 젖으며 풀어진다
앨범은 밤의 길바닥처럼 두꺼워
펼치면 밤을 새야한다

아가, 내 딸아,
벌레를 죽인다

벌레는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죽었는데도
피부는 뽀얗게 징그럽고 죽은 살이 불어
펴지는 주름들은 추악하게 예쁘다

아버지가 와서
내 손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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