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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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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35회 작성일 2025-03-07 11:23:2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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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김용택

안녕, 아빠.
지금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마치 시 같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이
한그루의 나무 같다.
잔디와 나무가 있는 집들은 멀리 있고,
햇살과 바람과 하얀 낮달이 내 마음속을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한그루의 나무가 세상에 서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고 또 잊어야 하는지.
비명의 출구를 알고 있는
나뭇가지들은 안심 속에 갇힌
지루한 서정 같지만
몸부림의 속도는 바람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내부의 소리다. 사람들의 내일은 불투명하고,
나무들은 계획적이다.
정면으로 꽃을 피우지.
나무들은 사방이 정면이야, 아빠.
아빠, 세상의 모든 말들이
실은 하나로 집결되는 눈부신
그 행진에 참가할 날이 내게도 올까.
뿌리가 캄캄한 땅속을 헤집고 뻗어가듯이
달이 행로를 찾아 언 강물을 지나가듯이
비상은 새들의 것,
정돈은 나무가 한다. 혼란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은
마치 반성 직전의 시인 같아.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 머릿속은 평생 복잡할 거래.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면
아빠의 눈빛은 집중적이래.
아빠,
피츠버그에 사는 언니의 삶은 한권의 책이야.
책이 쓰러지며 내는 소리와
나무가 쓰러질 때 내는 소리는 달라.
공간의 크기와 시간이 길이가 다르거든.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높은 첨탑이 있는 성당의 종소리처럼 슬프게
온 마을에 퍼진다니까.
폭풍을 기다리는
고요와
적막을
견디어내지 못한 시간들이
앞으로 돋아나지 못할 거야.
나는 가지런하게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해.
이국의 하늘, 아빠,
여기는 내 생의 어디쯤일까?
눈물이 나오려고 해.
버스가
영화 속 장면처럼 나를 데리러 왔어.
아빠는, 엄마는, 또 한 차례
또 한 계절의 창가에 꽃 피고 잎 피는 것에  놀라며
하루가 가겠네.
문득 문득 딸인 나를 생각할지 몰라. 나는  알아. 
엄마의 시간, 아빠의 시간, 그리고 나만의  시간,
오빠가 걸어다니는 시간들, 나도 실은 그 속에  있어.
피츠버그에서는 버스가 나무의 물관 속을 지나다니는 물 같이 느려.
피츠버그에 며칠 머문 시간들이
또,
그래.
구름처럼 지나가는
책이 되어.
한장을 넘기면
장은 접히고
다른 이유가, 다른 이야기가 거기 있었지.
책을 책장에 꽂아둔 것 같은
내 하루가 그렇게 정리되었어.
나는 뉴욕으로 갈 거야.
뉴욕은 터득과 깨달음을 기다리는
막 배달된 책더미 같아.
어디에 이르고, 어디에 닿고, 그리고 절망하는  도시야.
끝이면서 처음이고
처음이면서 끝 같아.
외면과 포기보다 불만과 긴장이 좋아.
선택이 싫어.
아빠, 나는 고민할 거야.
불을 밝힌 책장 같은 빌딩들,
방황이 사랑이고, 혼돈이 정돈이라는 걸 나도  알아.
도시의 내장은 석유 냄새가 나.
그래도 나는 씩씩하게 살 거야.
난 어디서든 살 수 있어.
시계초침처럼 떨리는 외로움을 난 보았어.
멀고 먼 하늘의 무심한 얼굴을 보았거든.
비행기 트랩을 오를 거야.
그리고 뉴욕.
인생은 마치 시 같아. 난해한 것들이 정리되고
기껏 정리하고 나면 또 흐트러진다니까. 그렇지만 아빠,
어제의 꿈을 잃어버린 나무같이
바람을 싫어하지는 않을 거야.
내 생각은
멈추었다가 갑자기 달리는 저 푸른 초원의 누떼 같아.
그리고 정리가 되어 아빠 시처럼 한그루 나무가 된다니까.
아빠는 시골에서 도시로 오기까지 반백년이  걸렸지.
난 알아, 아빠가 얼마나 이주를 싫어하는지.
아빠는 언제든지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겠지
감자가 땅을 밀어내고
자기 자리를 차지해가는 그런 긴장과 이완,
그리고 그 크기는 나의 생각이야.
밤 냄새가 무서워 마루를 통통 구르며 뛰어가 아빠 이불속에 
시린 발을 밀어넣으면
아빠는 깜짝 놀랐지.
오빠는 오른쪽, 나는 아빠의 왼쬭에 나란히  엎드려
아빠 책을 보았어.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를 거야.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
쓰러지는 것들도, 일어서는 것들처럼
다 균형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아가게 될 거야.
아빠, 삶은 마치 하늘 위에서
수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바람 같아.
안녕, 피츠버그.
내 생애의 한 페이지를 넘겨준 피츠버그,
그리고 그리운
아빠.

- 이 시는 제 딸이 저에게 쓴 편지가 모티브가 된 시입니다. 한 인간의 삶이, 어디에도 기대기 싫은 한 인간이 스스로 일어서고 넘어지고 일어서며 독립되어 가는 삶의 여정이 담겨 있는 시입니다. 세상에 대한 애정과 그리고 사랑을 얻어가는 삶의 방황과 고뇌와 그 행로가 엿보일 것입니다.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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