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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사후의 바람/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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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65회 작성일 2025-02-05 21:55:4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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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의 바람/강정

  오래전 한 편의 詩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

  불타는 시간들은 그대로 숲이 된다
  인간이 인간 바깥으로 떠돌아 짐승의 마음을 허공에 쓴다

  키스
  강정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나무들이 숨은 눈을 뜨는 장면은 오래전에 읽었던 동화가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미래는 시간의 이동에 의한 게 아니라 시간의 소멸에 의한 잠정적 결론, 너의 문 안에서 나는 모든 사랑이 체험하는 종말의 예언을 저작한다 너는 내 혀에서 음악과 시의 법칙을 섭취하려든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 든다 그러니까 이 키스는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이다 너의 문은 나의 키스에 의해 열리고 나의 키스에 의해 영원히 닫힌다 나는 너의 마지막 남자다 그러나 네게 나는 최초의 남자다 너의 문 안에서 궁극은 극단의 임사 체험으로 연결된다 흡혈의 미학을 전경화한 너의 덧니엔 관 뚜껑을 닫는 맛, 이라는 시어가 씌어졌다 지워진다 살짝 혀를 빼는 순간, 내 혓바닥에 어느 불우한 가족사가 크로키로 그려져 있다

  키스
  강정

  나는 문을 닫고 너의 몸을 받는다 내 안으로 들어온 너는 사뭇 여장부스러운 근골과 큰 키를 과시한다 뒷굽이 십 센티미터에 달하는 하이힐을 또박또박 디디며 혓바늘 사이를 배회한다 몸 밖으로 빠져나온 네 혀가 나라는 한 세상을 뒤집어 오랫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길몽과 흉몽 사이의 아득한 절대치의 추상화를 구상화한다 너는 무용에 어울리는 몸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건축에 어울리는 몸을 가졌다 그리하여 너는 내 몸이라는 凶家에서 춤추는 무희가 된다 내 혀는 너의 동선을 따라하며 네 가족들의 불편한 심기를 박물화한다 이 키스는 한 아이가 태어나고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초현실적 리포트다 내 혀를 뒤집으면서 너는 네 인생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탕진한다 나의 문은 너에 의해 닫히고 나의 문밖에서 모든 시간은 풀어진 물감처럼 시계 밖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내 속에서 죽었던 것들이 관 뚜껑을 열듯 내 몸을 열고 문 열린 너의 바깥으로 날아간다 두 겹으로 붙어 네 겹의 문으로 열리는 이 방생의 순간, 네 눈 속에 담겨 있는 짐승은 고대 중국 용봉문화 관련 서적에서 문득 흘려 보았던 오래전 내 얼굴이다 기뻐하라 너는 이제 오래전부터 인류가 꿈꿨던 환상의 미래, 춤추는 龍의 후손을 임신한 것이다

  -강정 시집『키스』(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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