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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숙] 빈 항아리 4 / 홍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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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27회 작성일 2024-10-06 16:32: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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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항아리 4 / 홍윤숙

  비어 있는 항아리 속엔
  보이지 않는 풍경 하나 걸려 있다
  꼭꼭 닫아건 문 안에서도 녹슬고 삭은 풍경은
  스르릉 울리는 제 목소리에 저 혼자 취해 있다
  이른 봄날 청솔가지 마디마디 눈트는 소리
  목련 지고 산단화 지고 모란 작약도 지고
  바람에 날려 땡감 떨어져 땅에 구르는 소리
  쥐똥나무 울타리에 쥐똥 같은 열매들
  똑똑 떨어지고
  앵두열매 딴다고 발돋움하다가
  엉덩방아 찧고 까르르까르르 웃어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노랫소리
  재깔대며 쿵쾅쿵쾅 뛰어다니던 소리
  여름날 저녁 어머니 손주들 손톱에
  봉숭아 꽃물 들여주신다고
  빨간 꽃잎 모아 백반 넣고 콩콩콩 찧는 소리
  스무 개 서른 개 풀잎 같은 손가락 일제히 내어밀고
  마루 끝에 앉아서 쿵다쿵쿵다쿵 궁둥방아 찧던 소리
  이윽고 차례로 가방 하나씩 등에 지고
  훨훨 떠나던 이별의 아침

  하얀 손 흔들며 돌아서 가는 길에 바람 소리
  어느 날 고목 같던 어머니 맥없이 쓰러져
  산으로 가시고 땅에 묻히던 육중한 관 소리
  흙 다지던 소리 가슴에 못박혀 빠지지 않는다
  생의 동반자도 그렇게 가고
  모두 다 말도 없이 떠나버린 후
  텅텅 빈 집은 그대로 거대한 빈 항아리가 되고
  남은 그 집 주인도 스스로 빈 항아리가 되어
  저 혼자 그렁그렁 울리는 그 많은 소리들
  깊고깊은 굴 속 영혼의 토굴에 울리는 소리들
  아무도 그 소리 듣지 못하는데
  빈 항아리 혼자 듣고 있다
  빈 항아리는 한 뼘 가슴에 끝없이 공허한
  광야가 되고
  평원처럼 널린 허공이 된다

  - 홍윤숙,『쓸쓸함을 위하여』(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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