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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나의 고래를 위하여/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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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3회 작성일 2025-04-14 14:15:5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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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래를 위하여/정일근

불쑥, 바다가 그리워질 때 있다면
당신의 전생(前生)은 분명 고래다

나에게 고래는 사랑의 이음동의어
고래와 사랑은 바다에 살아 떠도는 같은 포유류여서
젖이 퉁퉁 붓는 그리움으로 막막해질 때마다
불쑥불쑥, 수평선 위로 제 머리 내미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고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례다

당신이 본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
누구도 사랑의 모두를 꺼내 보여주지 않듯
고래도 결코 전부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한순간 환호처럼 고래는 바다 위로 솟구치고
시속 35노트의 쾌속선으로 고래를 따라 달려가지만
이내 바다 깊숙이 숨어버린 거대한 사랑을
바다에서 살다 육지로 진화해온
시인의 푸른 휘파람으로는 다시 불러낼 수 없어

저기, 고래!라고 외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고독한 사람은 육지에 살다 바다로 다시 퇴화해가고
그 이유를 사랑한 것이 내게 슬픔이란 말 되었다

바다 아래서 고래가 몸으로 쓴 편지가
가끔 투명한 블루로 찾아오지만
빙하기 부근 우리는 전생의 기억을 함께 잃어버려
불쑥,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다 아득한 밑바닥 같은 곳에서
소금 눈물 펑펑 솟구친다면
이제 당신이 고래다

보고 싶다,는 그 말이 고래다
그립다,는 그 말이 고래다

- 정일근,『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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