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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얼굴을 파묻다/정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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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77회 작성일 2025-03-07 16:46:2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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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파묻다/정끝별

흐르는 것들에서는 묵은 쌀겨 냄새가 난다
갓 담근 술항아리에서 포도알을 훔쳐 먹고
얼굴을 파묻던 한마당의 쌀더미는 따뜻했다
누렇게 좀먹던 스무 살 페루의 하늘도
쏟아질 듯 무겁기만 하던 원산도 별밭도
비어 있던 대성리 철둑길도 그늘 무성해
소나기 퍼붓고 세상은 선뜻 변했다
쌀벌레들은 다시 쌀더미에 향기로운 집을 짓고
푸른 들판에 누워 한 백년쯤 자고 싶어,
지친 男子는 잎도 지기 전 창백한 女子를 떠났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서늘한 질투도
이만큼 지나쳐서야 눈치채는 것인데
이 늦은 저녁 쌀을 씻으며
치댈수록 부예지는 쌀뜨물에 얼굴을 묻고
다행이다, 쌀벌레 껍질처럼
어제가 낙낙히 뜰 수 있다는 것은
부박했던 노래가 떠내려 갈 수 있다는 것은
촤르르 촤르르 말갛게 씻겨진 마음이
잘 익은 밥 냄새를 피워올릴 수 있다는 것은


흰 책 / 민음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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