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열두 개의 밤이 지나고 있다/ 장정욱 얼음 수화기 달의 옆모습 비상구 꽃은 잠이 들었네 > 문예지

열두 개의 밤이 지나고 있다/ 장정욱

​급하게 달려온 밤
옷도 벗지 못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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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를 보이는 것은 규율을 어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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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열두 개의 기차가 지나갈지 몰라
칸칸마다 다른 농도를 갖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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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까지 여민 함박눈
목까지 내민 장밋빛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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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잠속에선 당신의 그림자가 비밀스럽게 자라나지
끊을 수 없는 중독
아끼지 않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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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잠에 숨어들면 누구도 찾을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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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 다니는 잠과 일어나려는 잠 사이
나비 한 마리 날개를 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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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수화기/ 장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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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얼음 밑으로 들려오는 전화 벨소리
밤이 얇게 얼어가고 있다
잠깐 잠깐 소리를 죽인 채
너를 부른다, 여보세요
언 물결 위로
빙점을 오가는 너와 나의 숨소리
수화기는 차갑고
목소리는 물방울 튀듯
전파의 흐름을 벗어난다
얼어붙은 수화기에 갇힌 채
들려오지 않는 말들
꼬인 전화선으로
깨진 물결의 파장이 흐른다
점점 두꺼워지는 침묵의 결
눌러진 버튼마다
언 지문만 하얗게 남아있다
언제쯤 저 수화기가 녹을 수 있을까
냉기가 감도는 사이 목소리는
얼음 속 물고기처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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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옆모습/ 장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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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서서히 눈을 뜨는 어둠 앞
내일이 없는 서로의 하루를 어떤 방식으로 보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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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표정은 풀린 단추처럼 헐겁다
너의 옆모습이 어두웠다 잠깐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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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습관으로 말하는 우리들
뚝뚝 부러지는 성냥개비 같은 언어가 켜졌다가는 금세 꺼져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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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의 발목이 천변 물결에 들어있다
발목이 담긴 쪽은 푸르게
다른 한쪽은 검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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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환한 얼굴 건너편이 궁금하다
나와 달의 거리만큼 먼 저쪽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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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의 빛으로는 물결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다
앞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달빛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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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듣지 못한 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귀
우리는 그림자만 안고 각자의 밤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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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 장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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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구름을 묻어 놓고 간 계단에
칸칸이 새겨진 유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건널 수 없는 어제와 오늘의 관계
죽은 글자들이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계단 위 화초들은 저마다 목을 꺽은 채
마른 향기를 풍긴다
풍선처럼 부풀어 아프지 않은 발목
뚜벅뚜벅 소리를 잃은 지팡이
무릎을 세운 직각의 시선이
한 걸음을 읽어내지 못한다
어젯밤 불어온 흙먼지 사이로
묘지의 냄새가 터벅터벅 올라온다
당신이 그려 놓고 간 괄호 속
부르지 못할 어둠만 가득 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연락되지 않는 어제와 오늘
이리저리 흩어진 뼛가루 같은 말들
한 칸의 먼지 되어
먼 훗날을 풀석거린다
지나온 계단 밑으로
당신의 호흡이 흘러내린다
당신의 그림자는 한 칸씩 사라지고
나는 또 계단을 한 칸씩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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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잠이 들었네/ 장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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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숨은 봄의 씨앗처럼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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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에 싸인 과거와 지워질 바람 같은 맥박이
오후의 정맥을 타고 느리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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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은 아침마다 딱딱한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말이 착했던 남자는 302호로
귀가 착했던 여자는 402호로
한 조가 되는 저편에 혼자서 당신은 진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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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시간이 만나는 지점
한 번 열렸다 아주 닫혀버리는 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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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밖이 연결되기 전에
당신의 어두웠던 두 귀에 한 줌의 햇살을 흘려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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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고요가 울음을 끌고 간다
​
바람이 불자
당신이 지나간 봄의 통로에 흰나비 떼가 아득히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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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5년 《시로여는 세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