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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여는세상] [2015] 열두 개의 밤이 지나고 있다/ 장정욱 얼음 수화기 달의 옆모습 비상구 꽃은 잠이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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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91회 작성일 2024-09-28 09:10:05 댓글 0

본문

열두 개의 밤이 지나고 있다/ 장정욱

​급하게 달려온 밤
옷도 벗지 못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전부를 보이는 것은 규율을 어기는 것

오늘은 열두 개의 기차가 지나갈지 몰라
칸칸마다 다른 농도를 갖고 있지

목까지 여민 함박눈
목까지 내민 장밋빛 바람

열두 개의 잠속에선 당신의 그림자가 비밀스럽게 자라나지
끊을 수 없는 중독
아끼지 않는 거짓말

네 잠에 숨어들면 누구도 찾을 수 없지

끌려 다니는 잠과 일어나려는 잠 사이
나비 한 마리 날개를 접지

 

얼음 수화기/ 장정욱

 
살얼음 밑으로 들려오는 전화 벨소리
밤이 얇게 얼어가고 있다
잠깐 잠깐 소리를 죽인 채
너를 부른다, 여보세요
언 물결 위로
빙점을 오가는 너와 나의 숨소리
수화기는 차갑고
목소리는 물방울 튀듯
전파의 흐름을 벗어난다
얼어붙은 수화기에 갇힌 채
들려오지 않는 말들
꼬인 전화선으로
깨진 물결의 파장이 흐른다
점점 두꺼워지는 침묵의 결
눌러진 버튼마다
언 지문만 하얗게 남아있다
언제쯤 저 수화기가 녹을 수 있을까
냉기가 감도는 사이 목소리는
얼음 속 물고기처럼 눈을 감았다

 

달의 옆모습/ 장정욱

 
달빛이 서서히 눈을 뜨는 어둠 앞
내일이 없는 서로의 하루를 어떤 방식으로 보내줄까

밤의 표정은 풀린 단추처럼 헐겁다
너의 옆모습이 어두웠다 잠깐 환해진다

각자의 습관으로 말하는 우리들
뚝뚝 부러지는 성냥개비 같은 언어가 켜졌다가는 금세 꺼져버리는

버들의 발목이 천변 물결에 들어있다
발목이 담긴 쪽은 푸르게
다른 한쪽은 검게 흐른다

너의 환한 얼굴 건너편이 궁금하다
나와 달의 거리만큼 먼 저쪽의 시선

반쪽의 빛으로는 물결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다
앞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달빛 때문에

아무 것도 듣지 못한 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귀
우리는 그림자만 안고 각자의 밤으로 돌아갔다

 

비상구/ 장정욱


당신이 구름을 묻어 놓고 간 계단에
칸칸이 새겨진 유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건널 수 없는 어제와 오늘의 관계
죽은 글자들이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계단 위 화초들은 저마다 목을 꺽은 채
마른 향기를 풍긴다
풍선처럼 부풀어 아프지 않은 발목
뚜벅뚜벅 소리를 잃은 지팡이
무릎을 세운 직각의 시선이
한 걸음을 읽어내지 못한다
어젯밤 불어온 흙먼지 사이로
묘지의 냄새가 터벅터벅 올라온다
당신이 그려 놓고 간 괄호 속
부르지 못할 어둠만 가득 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연락되지 않는 어제와 오늘
이리저리 흩어진 뼛가루 같은 말들
한 칸의 먼지 되어
먼 훗날을 풀석거린다
지나온 계단 밑으로
당신의 호흡이 흘러내린다
당신의 그림자는 한 칸씩 사라지고
나는 또 계단을 한 칸씩 쌓아 올린다



꽃은 잠이 들었네/ 장정욱

 
당신의 숨은 봄의 씨앗처럼 날아왔다

습기에 싸인 과거와 지워질 바람 같은 맥박이
오후의 정맥을 타고 느리게 지나간다

공장은 아침마다 딱딱한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말이 착했던 남자는 302호로
귀가 착했던 여자는 402호로
한 조가 되는 저편에 혼자서 당신은 진열된다

두 개의 시간이 만나는 지점
한 번 열렸다 아주 닫혀버리는 문이 있다

안과 밖이 연결되기 전에
당신의 어두웠던 두 귀에 한 줌의 햇살을 흘려 넣는다

환한 고요가 울음을 끌고 간다

바람이 불자
당신이 지나간 봄의 통로에 흰나비 떼가 아득히 날린다


인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5년 《시로여는 세상》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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