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광남일보 신춘문예]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이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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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이정임
잘방잘방
가을 강은 할 말이 참 많답니다
저렇게 눈부신 석양은 처음이라고 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도무지 닫혀 있던 입
흰 귓바퀴 꽃을 봅니다
안개 짙은 그 하얀 꽃을요
나는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한 바퀴 즐거운 나의 집, 두 바퀴 세 바퀴 현絃을 타 봅니다 눈감고 오물오물 따라하는 어르신 핑 돌아 떨어지는 눈물 한낮의 요양원 창밖으로 찔끔 찍어 냅니다 사람들은 먼 나무위에 앉아 졸고 가을 강은 나를 자꾸 떠밀고 갑니다 알 없는 안경너머로 두 다리 유니폼의 건장한 날이 있습니다 서슬 퍼런 기백이 있습니다 백지로 두고 떠나자고 말한 적 있답니다 구절초 강아지풀 억새 어우러진 둔덕 제 모습에 반해 석양을 품은
비록 비위관脾胃管에 연명하지만 포르르 동박새 동백나무에 오르고 옛 기억 하나둘 돌아옵니다 참 맑은 하늘이 도리질 치다가 풀썩 잠이 들라 합니다 퐁당 물구나무를 서거나 물비늘을 따라 멀리멀리 헤엄쳐가기도 하는
가을 강은 심하게 몸살을 앓는 중입니다
소실점 잘방잘방 아스라이 붉은
이정임_△전북 임실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휴학 중 △현재 남양주시 장애인복지관 근무(사회복지사)
시 심사평 "균일한 울림…따스하고 섬세한 서정 기대"
밤을 새워 영혼의 즙을 짠 문청들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시를 쓰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지 않고 시를 쓴 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엔 끊임없이 시를 쓰는 이들이 태어나고 그들의 시에서 영혼의 위로를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삶과 시. 지극히 이질적인 두 존재의 병치야말로 현생 인류를 설명하는 가장 따스하고 지적인 방식 아닐런지요.
‘점자책’ 외 4편, ‘트라이앵글’ 외 4편, ‘내 안의 붙박이장’ 외 4편,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외 4편의 작품을 읽는 동안 마음 안이 따뜻해졌습니다. 현실과 유리되지 않았고 난해시의 범람에서도 거리를 두고 있었지요. ‘시가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해야하지?’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삶을 붙들고 있는 섬세한 현의 긴장이 느껴졌지요.
‘점자책’의 주인은 ‘손으로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의 꿈을 새들이 부리 끝으로 톡톡톡 문 열어 달라’ ‘혹등고래가 허공을 유영하듯 지느러미를 펄럭인다’고 묘사했습니다. 세계를 인식하는 차이를 결핍감이 아닌 자신만의 이해로 받아들였지요. ‘트라이앵글’은 작은 타악기를 통해 인간의 의미에 다가가는 인식의 바다가 있었지요 ‘인간은 사랑을 이해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와 같은 범상한 인식이 트라이앵글의 진동을 통해 다가오는 순간 시의 본질이 은유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내 안의 붙박이장’은 함께 응모한 ‘별주부전이 생각날 때 쯤’과 함께 우리 시의 고질적인 난해성을 극복한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낡은 가구와 고전을 통해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같은 인간의 본성을 쉬운 언어로 표현한 미덕이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읽어가는 동안 제목이 주는 일시적인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성이 맑고 착한 시였지요. 휠체어를 밀며 휠체어 안의 어르신에게 조용조용 가을 강을 얘기해 주는 모습이 따스했습니다. 쉬운 언어가 갖는 촉촉한 질감이 강 건너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신비한 느낌이 있었지요, ‘내 안의 붙박이장’과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모두 당선작이 될 시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당선작으로 정한 이유는 함께 응모한 ‘숙부’, ‘내가 꽃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봄 언저리 호박벌이 맨땅에서 구를 때’와 같은 시편들이 지닌 균일한 울림 때문이었습니다.
따스하고 섬세한 서정의 물결이 세계를 향한 큰 울림이 될 수 있음을 당당히 보여주는, 멋진 시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곽재구(시인·前 순천대 교수)
이정임
잘방잘방
가을 강은 할 말이 참 많답니다
저렇게 눈부신 석양은 처음이라고 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도무지 닫혀 있던 입
흰 귓바퀴 꽃을 봅니다
안개 짙은 그 하얀 꽃을요
나는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한 바퀴 즐거운 나의 집, 두 바퀴 세 바퀴 현絃을 타 봅니다 눈감고 오물오물 따라하는 어르신 핑 돌아 떨어지는 눈물 한낮의 요양원 창밖으로 찔끔 찍어 냅니다 사람들은 먼 나무위에 앉아 졸고 가을 강은 나를 자꾸 떠밀고 갑니다 알 없는 안경너머로 두 다리 유니폼의 건장한 날이 있습니다 서슬 퍼런 기백이 있습니다 백지로 두고 떠나자고 말한 적 있답니다 구절초 강아지풀 억새 어우러진 둔덕 제 모습에 반해 석양을 품은
비록 비위관脾胃管에 연명하지만 포르르 동박새 동백나무에 오르고 옛 기억 하나둘 돌아옵니다 참 맑은 하늘이 도리질 치다가 풀썩 잠이 들라 합니다 퐁당 물구나무를 서거나 물비늘을 따라 멀리멀리 헤엄쳐가기도 하는
가을 강은 심하게 몸살을 앓는 중입니다
소실점 잘방잘방 아스라이 붉은
이정임_△전북 임실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휴학 중 △현재 남양주시 장애인복지관 근무(사회복지사)
시 심사평 "균일한 울림…따스하고 섬세한 서정 기대"
밤을 새워 영혼의 즙을 짠 문청들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시를 쓰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지 않고 시를 쓴 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엔 끊임없이 시를 쓰는 이들이 태어나고 그들의 시에서 영혼의 위로를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삶과 시. 지극히 이질적인 두 존재의 병치야말로 현생 인류를 설명하는 가장 따스하고 지적인 방식 아닐런지요.
‘점자책’ 외 4편, ‘트라이앵글’ 외 4편, ‘내 안의 붙박이장’ 외 4편,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외 4편의 작품을 읽는 동안 마음 안이 따뜻해졌습니다. 현실과 유리되지 않았고 난해시의 범람에서도 거리를 두고 있었지요. ‘시가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해야하지?’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삶을 붙들고 있는 섬세한 현의 긴장이 느껴졌지요.
‘점자책’의 주인은 ‘손으로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의 꿈을 새들이 부리 끝으로 톡톡톡 문 열어 달라’ ‘혹등고래가 허공을 유영하듯 지느러미를 펄럭인다’고 묘사했습니다. 세계를 인식하는 차이를 결핍감이 아닌 자신만의 이해로 받아들였지요. ‘트라이앵글’은 작은 타악기를 통해 인간의 의미에 다가가는 인식의 바다가 있었지요 ‘인간은 사랑을 이해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와 같은 범상한 인식이 트라이앵글의 진동을 통해 다가오는 순간 시의 본질이 은유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내 안의 붙박이장’은 함께 응모한 ‘별주부전이 생각날 때 쯤’과 함께 우리 시의 고질적인 난해성을 극복한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낡은 가구와 고전을 통해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같은 인간의 본성을 쉬운 언어로 표현한 미덕이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읽어가는 동안 제목이 주는 일시적인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성이 맑고 착한 시였지요. 휠체어를 밀며 휠체어 안의 어르신에게 조용조용 가을 강을 얘기해 주는 모습이 따스했습니다. 쉬운 언어가 갖는 촉촉한 질감이 강 건너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신비한 느낌이 있었지요, ‘내 안의 붙박이장’과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모두 당선작이 될 시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당선작으로 정한 이유는 함께 응모한 ‘숙부’, ‘내가 꽃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봄 언저리 호박벌이 맨땅에서 구를 때’와 같은 시편들이 지닌 균일한 울림 때문이었습니다.
따스하고 섬세한 서정의 물결이 세계를 향한 큰 울림이 될 수 있음을 당당히 보여주는, 멋진 시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곽재구(시인·前 순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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