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김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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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집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길을 잃는 방법을 잃어버린 동네에서
구획이 잘 나누어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어느새 공원은 개들이 풀어놓은 동심원으로 가득 찬다
나는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꼬리에 시선을 두고 여백에 시선을 두고 선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이 돌 수 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손끝과 반대쪽 손끝 사이의 거리를 잰다
선은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다
원이 아닌, 모든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백자가 어떤 모형으로 구워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 들여 유약을 칠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희고 맑다
어느새 풍경은 백자가 되어 있다
김혜린_숭실대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마음의 형태’를 부드러운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줘
시 부문에 응모한 작품들을 세밀하게 읽었다. 작년에 비해 응모 편수는 조금 줄었지만, 응모작들의 수준은 높다는 데에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들이 많아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응모작들은 개인적 서사를 시로 풀어낸 작품들의 비중이 컸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삶의 질곡과 통증, 소통의 회복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시적 모티프로 폐점과 채무, 구직과 고된 노동 등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곤고한 일상을 체감할 수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들은 ‘행방’ ‘비광’ ‘인공눈물’ ‘어린이는 자란다’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이었다.
‘행방’은 외할머니의 부음을 들은 시적 화자의 내면을 담담하게 노래한 작품이었다. ‘귤’ 냄새로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마음의 누선을 건드려 뭉클했다. 도입부가 다소 평이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비광’은 삼촌이 겪은 비탄의 내용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가게 구조와 “오 도씩 기울어진 화장실”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묘사가 돋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삼촌에게 곧 닥칠 절망에 대한 어두운 암시로 유효하게 연결시켰다. 개인적 체험을 보다 보편적으로 확장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인공눈물’은 함께 보내온 다른 시편들에 비해 새로웠다. 사물을 결합해서 정서를 만들어내는 신선한 솜씨가 있었다. 이 작품은 영화를 보며 “울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있는 공통의, 애련(哀憐)의 감정을 발견해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돌려놓을 수 있는 모양은 없어요”와 같은 표현에서처럼 모호한 진술이 더러 있었다.
‘어린이는 자란다’는 성장기를 다뤘는데 자아와 가족과의 관계를 진솔하게 표현해 감동적이었다. 시행의 경쾌한 보법도 인상적이었다. 서사가 길어지면서 긴장감을 상쇄하는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동의했다. 우선 이 작품을 포함해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산문적인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생신(生新)한 이미지와 사유의 쌓임이 특별하게 만들어낸 시구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어서 시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견인해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특히 당선작은 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서정을 빚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단순하게 도자기를 빚어내는 경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획된 직선과는 대별되는 곡선과 둥긂을 지향하는 마음의 형태를 백자의 부드럽게 굽은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주었다. 이러한 안목과 감각이라면 앞으로 시단에서 자신만의 육성을 산뜻하고 묵직하게 표출할 신예라는 데에 깊은 신뢰와 기대를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나희덕·문태준·박형준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집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길을 잃는 방법을 잃어버린 동네에서
구획이 잘 나누어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어느새 공원은 개들이 풀어놓은 동심원으로 가득 찬다
나는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꼬리에 시선을 두고 여백에 시선을 두고 선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이 돌 수 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손끝과 반대쪽 손끝 사이의 거리를 잰다
선은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다
원이 아닌, 모든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백자가 어떤 모형으로 구워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 들여 유약을 칠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희고 맑다
어느새 풍경은 백자가 되어 있다
김혜린_숭실대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마음의 형태’를 부드러운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줘
시 부문에 응모한 작품들을 세밀하게 읽었다. 작년에 비해 응모 편수는 조금 줄었지만, 응모작들의 수준은 높다는 데에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들이 많아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응모작들은 개인적 서사를 시로 풀어낸 작품들의 비중이 컸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삶의 질곡과 통증, 소통의 회복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시적 모티프로 폐점과 채무, 구직과 고된 노동 등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곤고한 일상을 체감할 수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들은 ‘행방’ ‘비광’ ‘인공눈물’ ‘어린이는 자란다’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이었다.
‘행방’은 외할머니의 부음을 들은 시적 화자의 내면을 담담하게 노래한 작품이었다. ‘귤’ 냄새로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마음의 누선을 건드려 뭉클했다. 도입부가 다소 평이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비광’은 삼촌이 겪은 비탄의 내용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가게 구조와 “오 도씩 기울어진 화장실”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묘사가 돋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삼촌에게 곧 닥칠 절망에 대한 어두운 암시로 유효하게 연결시켰다. 개인적 체험을 보다 보편적으로 확장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인공눈물’은 함께 보내온 다른 시편들에 비해 새로웠다. 사물을 결합해서 정서를 만들어내는 신선한 솜씨가 있었다. 이 작품은 영화를 보며 “울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있는 공통의, 애련(哀憐)의 감정을 발견해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돌려놓을 수 있는 모양은 없어요”와 같은 표현에서처럼 모호한 진술이 더러 있었다.
‘어린이는 자란다’는 성장기를 다뤘는데 자아와 가족과의 관계를 진솔하게 표현해 감동적이었다. 시행의 경쾌한 보법도 인상적이었다. 서사가 길어지면서 긴장감을 상쇄하는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동의했다. 우선 이 작품을 포함해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산문적인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생신(生新)한 이미지와 사유의 쌓임이 특별하게 만들어낸 시구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어서 시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견인해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특히 당선작은 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서정을 빚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단순하게 도자기를 빚어내는 경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획된 직선과는 대별되는 곡선과 둥긂을 지향하는 마음의 형태를 백자의 부드럽게 굽은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주었다. 이러한 안목과 감각이라면 앞으로 시단에서 자신만의 육성을 산뜻하고 묵직하게 표출할 신예라는 데에 깊은 신뢰와 기대를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나희덕·문태준·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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