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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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낡고 지친 눈빛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이예진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담담하게 펼친 일상의 세목들로, 가계·욕망·폭력의 민낯을 기록하다"
새로운 시인의 작품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면 으레 의심을 품게 된다. 이 의심의 방향은 작품과 시인이 아니라 이것을 대하는 스스로를 향한다. 이제껏 내가 시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되짚어보고 추궁하는 것이다. 불안과 함께 하지만 그렇다고 안도를 바라는 일은 아니다. 늘 내가 가진 관점이 보기 좋게 깨지기를, 그리하여 아프게 갱신되기를 원한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함께 쓰는 이가 아니라 함께 읽는 이로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번 심사에 임하는 위원 모두가 이러한 마음이었다.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외 4편을 투고한 이예진씨를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로 정한다. 시인의 언어는 선명하고 정직하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진술들을 차곡차곡 쌓아 어느새 의무도 당위도 필요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울러 시인은 파편화된 삶의 장면들을 그러모아 큰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능숙하다. 불필요한 제스처 없이 일상의 세목들을 담담하게 펼쳐내면서도 그 안에 가계와 욕망과 폭력 같은 유구한 것들의 민낯을 기록한다.
시인이 창출해내는 이미지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사유와 관념을 단단히 비끄러매면서도 일순간 낯선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지점들이 인상적이었다. 부디 앞으로도 사유와 언어, 서사와 이미지 사이를 마음껏 횡보하며 시작(詩作)해주기를 당선자께 바란다. 진정한 문학적 자유로움과 균형감이란 조심스레 살피며 걷는 일이 아닌 어떤 극단까지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니까.
시와 문학은 현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순하게 응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하는 일에만 복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살아가며 여전히 읽고 쓰는 일만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낙선한 분들에게 마음을 다해 위로를 전하고 싶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시와 살아낼 시간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마음도 함께.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게 될까. 불안전하고 불완전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의심을 품어야 할까. 그러면서도 어떤 온전한 미감에 깨어지지 않을 삶을 기대야 하겠지. ‘신춘문예’. 계절만 벌써 새봄이다.
심사위원 이수명, 김민정, 박준(대표 집필)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낡고 지친 눈빛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이예진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담담하게 펼친 일상의 세목들로, 가계·욕망·폭력의 민낯을 기록하다"
새로운 시인의 작품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면 으레 의심을 품게 된다. 이 의심의 방향은 작품과 시인이 아니라 이것을 대하는 스스로를 향한다. 이제껏 내가 시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되짚어보고 추궁하는 것이다. 불안과 함께 하지만 그렇다고 안도를 바라는 일은 아니다. 늘 내가 가진 관점이 보기 좋게 깨지기를, 그리하여 아프게 갱신되기를 원한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함께 쓰는 이가 아니라 함께 읽는 이로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번 심사에 임하는 위원 모두가 이러한 마음이었다.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외 4편을 투고한 이예진씨를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로 정한다. 시인의 언어는 선명하고 정직하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진술들을 차곡차곡 쌓아 어느새 의무도 당위도 필요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울러 시인은 파편화된 삶의 장면들을 그러모아 큰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능숙하다. 불필요한 제스처 없이 일상의 세목들을 담담하게 펼쳐내면서도 그 안에 가계와 욕망과 폭력 같은 유구한 것들의 민낯을 기록한다.
시인이 창출해내는 이미지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사유와 관념을 단단히 비끄러매면서도 일순간 낯선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지점들이 인상적이었다. 부디 앞으로도 사유와 언어, 서사와 이미지 사이를 마음껏 횡보하며 시작(詩作)해주기를 당선자께 바란다. 진정한 문학적 자유로움과 균형감이란 조심스레 살피며 걷는 일이 아닌 어떤 극단까지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니까.
시와 문학은 현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순하게 응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하는 일에만 복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살아가며 여전히 읽고 쓰는 일만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낙선한 분들에게 마음을 다해 위로를 전하고 싶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시와 살아낼 시간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마음도 함께.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게 될까. 불안전하고 불완전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의심을 품어야 할까. 그러면서도 어떤 온전한 미감에 깨어지지 않을 삶을 기대야 하겠지. ‘신춘문예’. 계절만 벌써 새봄이다.
심사위원 이수명, 김민정, 박준(대표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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