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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시사사 신인추천작품상 시부문 당선작] 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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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86회 작성일 2023-07-23 11:01: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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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시사사 신인추천작품상 시부문 당선작] 김혜정
■얼룩말 외 2편

얼룩말

술에 취하면 말이 되었다. 하얀 말과 검은 말이 밥상 위로 지나갔다. 밥과 나물이 말라 갔다. 엄마의 무릎에 식은땀이 맺혔다. 아버지는 했던 말들을 다시 시작했다. 또다시 말이 지나갔다. 하얀 말과 검은 말이 천장에 쌓였다. 검은 구름이 생겼다. 소나기가 내렸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이별을 반복했다.

손에 쥔 숟가락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젓가락은 밥상 위에 질문을 만들었다. 질문은 궁금증이 되었다. 큰 말과 작은 말은 진흙탕이 되었다. 진흙 속으로 푹푹 빠졌다. 말은 빙글빙글 돌았다. 말은 말로 그물을 만들었다.

마른 말과 축축한 말이 이불 위로 지나갔다. 엄마는 솜이불을 탁탁 때리면서 말들을 잡았다. 바늘에 실을 꿰어 한 뼘씩 쑥쑥 잡아당겼다. 입을 닫은 것처럼 단단하게 이불을 붙잡았다. 초록색 이불 위로 엄마의 손은 나비가 되었다. 촘촘하게 날아다니면서 말을 가위로 잘랐다.

말은 크게 소리를 낼 때 힘이 생겼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어갔다. 아버지는 말로 엄마를 쿡쿡 찔렀다.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린처럼 목이 길어졌다. 밥상에서 귀를 닫고 보았다. 하얀 말과 검은 말이 겹쳐진 얼룩말이 뛰어다녔다.

타자기

뚜껑을 열면 검은 구두를 신은 발이 되었다. 어제는 언덕까지 오르는데 뒤로 자꾸 넘어져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돌멩이를 벽으로 던지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한 손에는 돌멩이 하나를 쥐었는데 던질 때는 두개가 되었다. 발보다 손이 먼저였다. 스텝이 꼬였다.

오늘은 어제보다 천천히 걸었다. 어제 보지 못한 징검다리와 오리 떼를 보았다. 구름 속에 가려진 해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발은 눈보다 확실하지 않아서 발자국을 남겼다. 발자국 속에서 지렁이를 보았다.

지렁이는 길을 만들었다. 옆으로 앞으로 온몸에 상처가 생겼다. 지렁이는 지치지 않았다. 몸이 둘로 갈라졌다. 몸 하나는 땅속으로 몸 하나는 시멘트 바닥으로 기어갔다. 돌멩이에 부딪고 모래범벅이 되었다.

모래는 지렁이를 덮었다. 모래는 모래처럼 겉돌았다. 모래로 이야기를 만들면 이야기가 모일까 흩어질까. 모래 속에 갇힌 발이 이야기를 더듬었다. 이야기는 시작이 있었고 끝이 없었다. 발 위로 빗소리가 떨어지면 탭댄스 동작을 흉내 냈다. 빠르고 정확하게 발이 닿을 쯤 새벽이 되었다. 퉁퉁 부은 발을 가지런히 놓았고 검은 뚜껑을 닫았다. 형광등이 윙크를 했다. 종이가 발자국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릭모모

생각이 반으로 갈라질 때 손뼉을 쳤다

우리는 어제 텔레비전에서 보았고
오늘은 카페 유리창 너머를 기웃거렸다
내일은 문을 열고 들어가겠죠

이름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아요
분홍과 하양의 배치를 떠올리면 웃음이 나왔다

무엇이든 다 숨길 수 있어서 좋았어요
출입문에 매달아 놓은 방울 소리는 매번 번져갔지요

꾸덕꾸덕해진 바깥 날씨를 당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군요
말랑하고 끈적한 복숭아에 시선이 모여요
우리는 당신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지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때
생각은 바닥과 가까울 수 있을까

복숭아 껍질이 도마 위로 겹겹이 쌓여갈 때
당신의 호기심이 밖으로 이동하길 바랄게요
모모와 그릭이 한껏 어우러져서

웃음도 반반으로 나눌 수 있기를

김혜정_1974년 전북 부안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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