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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202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책가도/이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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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90회 작성일 2025-01-14 10:54:4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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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도/이수국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오크 향 원목 책장을 창문 앞에 세웠다
책을 좋아한 왕이 책가도(冊架圖)를 세워 일월오봉도를 가렸듯
햇살과 달이 가려진 방
창틈으로 들어온 빛이 어둠을 가른다
박물관 유리문 너머 책가도
가로와 세로의 배열 속, 그림 위에 꽂힌 천년의 페이지들
그림 속 책을 보던 왕과
유리문 안을 보는 내 눈이 책가도 위에서 만났다
그림 한구석 은밀히 쓴 화공의 이름이 흔들렸다
책장 바닥에 그늘 한 권을 괴자 몸이 중심을 잡는다
무너지던 중력을 다시 세운 건 한 권의 책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꺼내면
그들의 체온이 손끝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오고
작가를 지우며 작가를 꽂는다
이럴 때 사전을 거역하는 것은 유쾌한 일
문장이 자라는 시간
스위치를 켜면 책과 나는 조도가 같아져
수백 년 전 죽은 우린 서로 이마를 맞대며 이야기한다
눈감은 순간에도 새로운 이름이 눈을 뜨고
서로 다른 시계들이 태엽을 돌리면 한 곳에서 만나는 페이지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
바람과 함께 써가는 연대기
이곳에도 낱장 사이 기압골이 있어 새로운 바람이 분다
내 안의 책장을 만지면 나는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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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수국
△전남 보성 生
△한국방통대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졸업

시를 쓰지 않고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무렵, 당선 소식이 도착했다. 늦게 시를 시작하는 내게 어느 시인이 말씀하셨다. 먼저 자신만의 노트북을 준비하라고, 그리고 하루 한 편씩 시를 쓰라고. 자신만의 방에서 홀로 바깥을 바라보면 그동안 보지 못한 또 다른 세계가 보일 것이라고.

혼자 가야 하는 그 무섭고 아득함에 시를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성장한 아이가 떠난 빈방에 뒤늦게 책장을 마련하고 외부와 차단된 공간을 한동안 침묵으로 채웠다.

그럴 때마다 백지에 쌓인 고요가 조금씩 밀려 나갔다. 갇혀서 더 넓어지는 나를 만나는 중이었다. 책을 읽고 목록을 정리하고 세상의 뒤편에 숨은 시를 찾는 일상으로 어지러운 호흡이 가지런해졌다. 책을 펼치면 낯선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가보지 못한 먼 곳까지 갈 수 있었다.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나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시의 길을 열어준 박지웅 선생님, 흔들릴 때 버팀목이 되어주신 마경덕 선생님, 박남희 선생님, 김이듬 선생님, 조정인 선생님, 이승희 선생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교수님들 존경과 감사를 올립니다.

문우들과 ‘시에게’ 동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격려를 아끼지 않는 가족에게도 사랑을 전합니다.

문을 열어주신 강원일보와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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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신춘문예 당선작 시 심사평]“정조가 좋아한 물건 중심 상상 펼쳐 ... 완성도도 높아”

올해는 역대 최대 규모의 응모작이 몰려 강원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김영희의 시조 ‘함박눈’, 박승균의 시 ‘묵호 4’, 이수국의 시 ‘책가도’ 등이다. 김영희의 시조 ‘함박눈’은 시조의 멋과 매력이 잘 스며있어 거듭 읽게 됐다. 시조 특유의 정제된 표현과 호흡, 그리고 현대적 감각 등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박승균의 시 ‘묵호 4’는 묵호를 제목으로 삼은 연작시 일곱 편 중 하나로, 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낭만적 서정성이 두드러졌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수국의 시 ‘책가도’는 정조가 좋아한 책가도를 중심으로 상상을 펼쳐나간 작품으로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았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통해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응모자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이영춘·이홍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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