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6]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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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조상호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혀가 있다 행려병자의 시체 같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그림자달은 빙산이 되어 은빛을 풀어헤친다 물빛을 깨고 비치나무 냄새 번져오는
젖을 희끗희끗 빤다 안개, 서늘한 빗방울, 물방울 띄워올린다 뿌리가 부풀어오른다 물거품처럼
*
웅웅거리고 부서지고 내장처럼 고요 쏟아져 내리고 내려야 할 역을 잃고 흘러가는 페름 행 전신주 흰 눈송이들 백야의 건반을 치는 사내 ―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 길고 가는 손가락 갈라지고 떠도는 핏방울 소용돌이 변두리로 나를 싣고 창 밖 쁘이찌 야흐 행 마주보며 또 길게 늘어나고 민무늬 토기처럼 얼굴 금이 가고 스쳐가는 가가문비나무 그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이는 시간 산란하는 밤의 시작을 경계를 지나 나는 또 바라보고 있고
마젤란 펭귄들 발자국 소리 울음 아 미역줄기처럼 늘어지고
*
움푹 파인 자국발자국들 혀 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 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종종 걸어나오고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
심사평
빠른 질주-멈춤의 리듬감… 언어적 상상력이 돋보여
본심에서 6명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펜트하우스’ 외 4편의 시는 비유를 적절히 운용해서 한 편의 시를 끌고 간다. ‘엄마가 방안에 앉아 재봉틀로 짝퉁 루이비통에 유성들을 박아넣는 경험’에서 시가 발아한다. 그 자리에서 재봉틀은 유성이 되고, 방은 펜트하우스가 되고, 인공위성을 미행하며, 재봉틀의 잔소리가 음속을 돌파한다. 비유된 세계와 실제 세계가 일대일로 대응하고 있다. 다른 시에서도 자신의 입으로 불어야만 하는 ‘진술’ 행위와 유리알 전구 만들기 같은 두 가지 행위가 ‘불다’라는 동사의 주어로서 같은 의미를 내포해 배열되고 있다. 그러나 시 한 편에 다 포함될 수 없는 문장들이 돌출하고, 비유에 치중하느라 현실감을 놓쳐 버리는 부분이 지적됐다.
‘훈풍’ 외 4편의 시는 시편마다에 들어 있는 간곡한 말, 경험을 고백할 때 언뜻 보이는 아픈 정경들의 표현이 좋았다. 자신의 기억을 말에 걸칠 때 그 말의 결을 스스로 발명해 내는 것이 시의 새로움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문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영특한 손놀림’, ‘팔딱이는 주먹 심장’처럼 두 개의 단어나 세 개의 단어로 경험을 응축해 버린 어구가 많고, 이 부분들이 오히려 시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외 4편은 상상력으로 시를 끌고 간다. 은유된 언어의 머뭇거림과 확장, 빠른 질주와 멈춤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시는 마치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처럼’ 언어로 만든 점과 선, 리듬으로 시에 여러 개의 경계를 설정한다. 동시에 언어적 상상으로 세상을 더듬어 나가고, 더불어 떠나고, 정신의 세계를 어루만진다.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음운과 음운들이 서로 조응하면서 달려간다. 시의 ‘입술을 달싹’여 저 ‘마젤란 펭귄’이 사는 곳까지 뿌리를 내리며 가는 것이 아마도 이 시인의 ‘식물학’이리라. 논의 끝에 응모작 5편 모두 고른 시적 개성과 성취를 가진 점을 높이 사서 ‘입과 뿌리에 대한 식물학’을 당선작으로 선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혀가 있다 행려병자의 시체 같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그림자달은 빙산이 되어 은빛을 풀어헤친다 물빛을 깨고 비치나무 냄새 번져오는
젖을 희끗희끗 빤다 안개, 서늘한 빗방울, 물방울 띄워올린다 뿌리가 부풀어오른다 물거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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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웅거리고 부서지고 내장처럼 고요 쏟아져 내리고 내려야 할 역을 잃고 흘러가는 페름 행 전신주 흰 눈송이들 백야의 건반을 치는 사내 ―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 길고 가는 손가락 갈라지고 떠도는 핏방울 소용돌이 변두리로 나를 싣고 창 밖 쁘이찌 야흐 행 마주보며 또 길게 늘어나고 민무늬 토기처럼 얼굴 금이 가고 스쳐가는 가가문비나무 그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이는 시간 산란하는 밤의 시작을 경계를 지나 나는 또 바라보고 있고
마젤란 펭귄들 발자국 소리 울음 아 미역줄기처럼 늘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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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푹 파인 자국발자국들 혀 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 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종종 걸어나오고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
심사평
빠른 질주-멈춤의 리듬감… 언어적 상상력이 돋보여
본심에서 6명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펜트하우스’ 외 4편의 시는 비유를 적절히 운용해서 한 편의 시를 끌고 간다. ‘엄마가 방안에 앉아 재봉틀로 짝퉁 루이비통에 유성들을 박아넣는 경험’에서 시가 발아한다. 그 자리에서 재봉틀은 유성이 되고, 방은 펜트하우스가 되고, 인공위성을 미행하며, 재봉틀의 잔소리가 음속을 돌파한다. 비유된 세계와 실제 세계가 일대일로 대응하고 있다. 다른 시에서도 자신의 입으로 불어야만 하는 ‘진술’ 행위와 유리알 전구 만들기 같은 두 가지 행위가 ‘불다’라는 동사의 주어로서 같은 의미를 내포해 배열되고 있다. 그러나 시 한 편에 다 포함될 수 없는 문장들이 돌출하고, 비유에 치중하느라 현실감을 놓쳐 버리는 부분이 지적됐다.
‘훈풍’ 외 4편의 시는 시편마다에 들어 있는 간곡한 말, 경험을 고백할 때 언뜻 보이는 아픈 정경들의 표현이 좋았다. 자신의 기억을 말에 걸칠 때 그 말의 결을 스스로 발명해 내는 것이 시의 새로움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문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영특한 손놀림’, ‘팔딱이는 주먹 심장’처럼 두 개의 단어나 세 개의 단어로 경험을 응축해 버린 어구가 많고, 이 부분들이 오히려 시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외 4편은 상상력으로 시를 끌고 간다. 은유된 언어의 머뭇거림과 확장, 빠른 질주와 멈춤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시는 마치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처럼’ 언어로 만든 점과 선, 리듬으로 시에 여러 개의 경계를 설정한다. 동시에 언어적 상상으로 세상을 더듬어 나가고, 더불어 떠나고, 정신의 세계를 어루만진다.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음운과 음운들이 서로 조응하면서 달려간다. 시의 ‘입술을 달싹’여 저 ‘마젤란 펭귄’이 사는 곳까지 뿌리를 내리며 가는 것이 아마도 이 시인의 ‘식물학’이리라. 논의 끝에 응모작 5편 모두 고른 시적 개성과 성취를 가진 점을 높이 사서 ‘입과 뿌리에 대한 식물학’을 당선작으로 선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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