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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일보] [2016] 맹수/ 정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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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03회 작성일 2024-09-24 15:41:40 댓글 0

본문

맹수/ 정율리

하늘에는 울타리가 없다
이 쪽 저 쪽으로 몰려다니는 철새들
초승달로 기러기 행렬이 지나간다

하늘을 맹수라 불러보다 깜짝 놀란다
이동하는 저 철새들의 몇 마리는
땅으로 혹은 바다위로 곤두박질 칠 거다
초승달이 몇 마리 삼키고
구름이나 혹은 비바람이 또 몇 마리 삼키겠지

기러기들 서둘러 달빛을 벗어나려
한밤의 속도로 튕겨져 나온 행렬
어둠에 묻힌 채 날고 있다
하늘은 야생이다
무엇이든 먹어치우려는 난무(亂舞)의 태생지다

밤낮이 자유롭고 계절도 마음대로 바꾼다
낮과 밤은 서로 피해 다닌다
가끔 날아가는 비행기가 지상으로 떨어지고
하늘을 날아오른 집이며 자동차들이
구겨진 채 떨어진다
빈 껍질만 떨어지는 걸로 보아
저 하늘에 포악한 야생의 무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울타리가 없으니 야생이다
날아가는 것들은 무엇에 쫓긴 듯 서둘러 날아간다
낮과 밤이 맹수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폭식을 하고
낮엔 낮에 보이는 것들을 사냥하고
밤엔 밤에 보이는 것들을 사냥한다
조용한 날들이 없는 입이다

​심사평
존재의 깊은 통찰·진중한 삶의 발걸음 박수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그 첫째 기쁨은 1985년에 시작된 대전일보 신춘문예가 1999년 우여곡절의 춘궁기를 거쳤다가 올해 부활한 일이다. 또 하나는 시 부분 응모작을 심사하는 즐거움이었다. 모든 시는 영혼의 파란만장이다. 그 파란만장이 드리운 수심과 파고와 물보라에 함께 젖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이곳저곳에서 시가 죽어간다고 장송곡을 읊조리지만, 외려 새로운 부흥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을 읽는 내내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새로운 시인과 눈빛을 나누며 맞절하는 일은 가슴 벅찬 일이다. 부족한 홍보에도 241명이 987편의 시를 응모했다.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선자들이 주목한 시는 김식씨의 <명랑한 그림>외 4편, 이명선씨의 <그린 토마토>외 2편, 정율리씨의 <맹수>외 4편이었다. 김식씨의 시는 전체적으로 신선했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물방울처럼 새로운 이미지가 솟아올랐다. 하지만, 딱히 한 작품을 선할 수가 없었다. 몇 번 읽다보니 사막을 걷듯 밋밋했다. 신선한 언어와 새로운 기법도 도식성에 빠질 수가 있구나. 경계하기 바란다. 손발을 삶의 바닥에 밀착시켜보는 어떨까? 아쉬움이 남았다.

이명선씨의 작품도 신선도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작품마다의 편차가 많았다. 독자를 미로로 끌고 가다가 작가가 외려 독자의 후미로 밀려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독자의 출구와 작가의 출구가 똑같을 필요는 없지만 행간에 간혹 친절한 안내도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랜 논의 끝에 정율리씨를 당선자로 뽑았다. 정율리씨의 작품은 모두 고른 수준이었다. 존재에 대한 깊은 해석과 중층적 사고 등은 다른 이의 작품보다 월등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가 휘발되는 시인을 많이 보아온 터라서 시인의 길을 오래 걸어갈 진중한 발걸음에 박수를 보내기로 했다. 분명 좋은 시인이 되리라. 선에 밀려난 다른 시인들의 아쉬움을 대신해서라도 각고의 길을 걸어가길 당부한다. 우리는 모두, 나이보다 작품이 일찍 늙는 일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당선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자리에 호명하지 않았어도 이미 좋은 시인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신작시를 쓰리라. 시는 또렷하게 작가를 응시한다. 서로 눈길 피하지 말자.

나태주·이정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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