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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2024] 파랑/엄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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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49회 작성일 2024-09-26 21:10:45 댓글 0

본문

파랑/엄지인

 잔디를 깎습니다
 마당은 풀 냄새로 비릿합니다
 잔디가 흘린 피와 눈물이라는 생각
 우린 서로 피의 색깔이 달라
 참 다행이지 혈통이 아주 먼 사이라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잘린 끝을 만져보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심장과는 아주 먼 거리일까요
 손 뼘으로 잴 수 있지만
 누군가는 머리에서 심장까지 전력을 다해 뜁니다
 머리카락 입장에선 불행일지 모른다는 생각
 골목 밖에선 길냥이의 울음소리가 날카롭습니다
 고양이는 사람에게만 소리 내 운다고 하는데
 축축한 여기 그냥 좀 내버려두라고
 배가 헐렁한 동물에게 보내는 우호적인 경고라는 생각
 다치지 않게 손톱 칼로 조심히 군살을 깎지만
 소스라칩니다
 가장자리에서 바깥으로 밀리지 않으려는 비명
 TV에서는 기상 캐스터의 주의보가 쾌속으로 지나갑니다
 암거북들이 짝을 잃고
 더운 바다를 피해 육지로 돌진합니다
 거울에 목을 비춰보니
 빗물이 빗장뼈 안으로 고여 흘러넘칩니다
 쇄빙선이 얼음을 부수고 지나간 듯
 물살이 온통 파랗습니다

​[심사평]
“기후변화시대의 명상 감각적으로 보여줘”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오랫동안 뜻과 주제와 내용 파악으로 시를 수용한 결과다. 시는 이해 너머 사랑의 영토다.

소리와 이미지, 독특한 어조, 명명할 수 없는 고유한 분위기들이 시의 건축학적 자재에 스며드는 사랑의 요소다. 풍화마저 건축의 일부이듯이 시의 건축에 있어 건축 너머의 천변만화하는 흐름을 놓치지 않을 때 이미 굳어진 기존의 이해는 새롭게 구축되고 우리의 일상 또한 새뜻해진다.

이해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너무 반듯하고 투명하게 닦인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이 쉬 잊히듯이 빠른 이해는 빠른 망각을 부르고 사유의 자동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해의 소비 시스템을 벗어난 시들은 대체로 창에 낀 먼지와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 같은 불투명을 거절하지 않는다. 물론 이 불투명은 방법적인 것으로서 ‘쉬운 시’나 ‘난해시’의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는 명징한 의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 가운데 ‘꼼꼼 수선집’과 ‘지구의 밤’, ‘파랑’이 최종 심사작이 되었다.

​어떤 작품을 택하든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으나‘파랑’의 경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활달하게 가로지르며 기후변화시대의 명상을 ‘손톱 칼로 조심히 군살을 깎는’ 감각적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미더웠다. 동봉한 작품들의 여일한 수준 또한 기대를 갖게 하였다.

세계의 그늘과 존재의 그늘이 예각화된 언어의 그늘과 만날 때 단순한 구별짓기로서의 개성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소비를 성찰하는 사랑의 참신한 사태가 될 수 있음을 앞으로 꾸준히 증명해주기 바란다. 당선을 축하한다.

손택수 시인

​[당선소감]

“시 쓰기란 글을 설득해 생기를 찾아가는 기쁨”
무정형의 시를 오래 쥐고 있었습니다. 시는 슬라임 같아 모양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이로 흘러내리고 추슬러도 빠져나갑니다. 손가락에 걸리는 몇을 들고 시라고 우긴 적도 있었습니다. 너무 단단하거나 너무 물렁하면 가차 없이 버려야 했습니다.

어느 해에는 삶이 너무 충만해서, 어느 해에는 삶이 너무 버거워서 뒤로 밀쳐 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람 잔잔해지면 이내 다시 꺼내어 전전긍긍했습니다.

본심에서 매번 탈락했기에 간절히 소식을 기다리던 중 기자님의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만 했습니다.

시는 한 번도 친절한 적 없었습니다. 대부분 창백한 단어와 문장인 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개성을 믿어주고 응원하는 문우가 없었다면 글을 설득하여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는 기쁨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족한 글에 기회를 열어주신 광주일보와 손택수 시인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꿈은 꾸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이루는 것이라고 알려주셨네요. 박순원 교수님, 김성철 교수님 감사합니다. 두 분을 만나 시 문을 열게 된 것은 무엇보다 큰 행운이었습니다.

​시 창작에 재미를 한 스푼 더해 주신 치치시시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고 이유정 선생님 몸소 보여주신 따뜻한 열정 잊지 않겠습니다. 생오지 문예창작촌과 봄날의 시 회원님에게도 감사와 응원을 전합니다. 광용, 지산, 채원, 부르면 먹먹해지는 이름 뒤에 무슨 말을 더할까요? 사랑한다는 말 밖에.

마지막으로 아버지, 시인의 꿈을 제가 대신 이루었네요. 투박하더라도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시를 쓰겠습니다.

​엄지인 시인
전남대 교육학과 졸업
생오지 문예창작대학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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