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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2024] 조명실/ 이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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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29회 작성일 2024-09-26 21:35:35 댓글 0

본문

조명실/ 이실비

 그 사람 죽은 거 알아?
 또보겠지 떡볶이 집에서
 묻는 네 얼굴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이상하지 충분히 안타까워하면서 떡볶이를 계속 먹고 있는 게 너를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게

 괜찮니?
 그런 물음들에 어떻게 답장해야할지 모르겠고

 겨울이 끝나면 같이 힘껏 코를 풀자
 그런 다짐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코를 흘리고 있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가 손톱을 벗겨내는 속도를 이기길 바랐다

 다정 걱정 동정
 무작정
 틀지 않고

 어두운 조명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초록색 비상구 등만
 선명히 극장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 이것이 지옥이라면

 관객들의 나란한 뒤통수
 그들에겐 내가 안 보이겠지

 그래도 나는 보고 있다

 잊지 않고 세어 본다



서울늑대/이실비​

 사랑을 믿는 개의 눈을 볼 때
 내가 느끼는 건 공포야

 이렇게 커다란 나를 어떻게 사랑할래?
 침대를 집어 삼키는 몸으로 묻던 하얀 늑대
 천사를 이겨 먹는 하얀 늑대

 흰 늑대 백 늑대 북극늑대
 시베리아 알래스카 캐나다 그린란드
 매일 찾아가도 없잖아
 서울에서 만나 서울에서 헤어진 하얀 늑대 이제 없잖아

 우린 개가 아니니까 웃지 말자
 대신에 달리자 아주 빠르게

​ 두 덩이의 하얀 빛

 우리는 우리만 아는 도로를 잔뜩 만들었다 한강 대교에서 대교까지 발 딛고 내려다 보기도 했다 미워하기도 했다 도시를 강을 투명하지 않은 물속을

 밤마다 내리는 눈
 까만 담요에 쏟은 우유
 천사를 부려먹던 하얀 늑대의 등

​ 네 등이 보고 싶어 자고 있을 것 같아 숨 고르며 털 뿜으며

 이불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영원

​ 목만 빼꼼 내놓고 숨어 다니는 작은 동물들
 나는 그런 걸 가져보려 한 적 없는데 하필 너를 데리고 집에 왔을까 내 몸도 감당 못하면서

 우리는 같은 멸종을 소원하던 사이
 꿇린 무릎부터 터진 입까지
 하얀 늑대가 맛있게 먹어치우던
 죄를 짓고 죄를 모르는 사람

​ 혼자 먹어야 하는 일 앞에서
 천사는
 입을 벌려 개처럼 웃어본다


​[심사평]
​능숙하고 절묘한 이미지 배치와 전개가 압도적 작품

신춘문예 작품을 검토하는 일은 새로운 시의 경향을 감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2651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백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팬데믹에 이어 전쟁과 기후위기 등 우리 삶의 불안이 참담한 형태로 가시화되는 한 해였던 만큼 그런 경향이 작품에도 반영됐다. 불안한 오늘날의 삶과 온몸으로 맞설 수 있는 작품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심사를 진행했다.

본심에서는 네 명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김보미의 ‘제 자리’ 외 4편은 유려하게 운용되는 시의 맛이 뛰어났다. 그러나 오히려 그 유려함이 시인만의 개성적인 시선과 태도를 가려 아쉽다는 의견이 있었다. 백민영의 ‘피에타’ 외 2편은 숙련도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의 구조와 전개 모두 능숙했지만 결국 그 모든 이야기가 혼자만의 이야기로 귀결되고야 말았다. 조금 더 크고 넓은 운동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끝까지 고민한 작품은 이영서의 ‘멀어지는 기분’ 외 2편이었다. 개성적인 시선과 발화가 만들어 내는 흥미로운 세계가 눈길을 끌었지만 단조롭거나 무리한 전개를 보이는 대목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이실비의 ‘서울늑대’와 ‘조명실’을 선정했다. 능숙하고 절묘한 이미지 배치와 전개가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시란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서울늑대’는 늑대가 되어 서울을 달리는 “두 덩이의 하얀 빛”을 통해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부터 드넓은 도시의 이미지까지 아우르며 그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 냈으며, 식당에서의 대화가 극장 조명실의 독백으로 전환되는 ‘조명실’은 죽음과 사랑, 불안과 고독 등을 극장 뒤편의 그림자 이미지로 모아 그것을 묵시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을 추출하는 데 성공해 냈다.

시인은 내밀한 고백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자다. 당선자는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앞으로도 자유롭게 이 세계를 유영하기를 바란다. 본심작을 포함해 뛰어난 투고작이 많았다. 머지않아 다른 지면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투고한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시에 대한 우리의 열의가 있는 한 시는 끊임없이 우리 삶과 더불어 이 세계와 대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 : 김소연 · 박연준 · 황인찬 시인

​[당선 소감]
겁에 질려도 끝까지 눈 피하지 않는 시 쓰고 싶어요

누군가는 가만히 있어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잃어버리고… 나는 슬펐다. 슬프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시로 썼다.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될까? 어둠 속에서 얼굴을 굶기는 사람들. 극장에서 그들이 관람하는 모든 것을 같이 목격하고 싶었다. 겁에 질려도 끝까지 눈을 피하지 않는 시를 쓰고 싶었는데.

이 눈싸움을 통해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점점 알 수 없게 됐다. 나는 시를 계속 쓰는 내가 좋았고 싫었다. 내가 자랑스럽고 창피했다.

시 쓰는 사람들을 만났다. 잔뜩 웃고 떠들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마음이 이상했다. 나는 아픈 시만 줄줄 써 댔는데, 그들이 쓰는 시도 그랬는데… 우리는 만나면 신나고 들떠 있었다.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문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시를 쓰면 처음에 하려던 말에서 아주 멀어져도 이해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겁먹은 제 시를 기꺼이 믿어 준 심사위원 김소연 시인님, 박연준 시인님, 황인찬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여름, 용기를 나눠준 이영주 시인님과 포에트리앤의 얼굴들 감사해요. 언제나 나를 무던히 지켜봐 주는 이들. 사랑하는 내 가족 민준 홍시 대추, 401호 연재와 민경, 건강원 고은과 효정, 그리고 현경이에게 많이 고마워요. 시를 쓰며 만났던 동료들의 꼼꼼하고 상냥한 진심들을 오래 기억하고 있어요. 적당히 두려워하며 씩씩하게 계속 쓸게요.

​이실비 시인

1995년 강원 속초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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