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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2024] 달로 가는 나무/김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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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46회 작성일 2024-09-26 21:38:18 댓글 0

본문

달로 가는 나무/김문자

달의 범람으로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땅은
다섯 개의 줄기로 자라는 은행나무의 품이 되었다
보름달 상현달 하현달 초승달 그믐달을 키우는

인천 장수동 사적 562*번 800년 된 은행나무
처음부터 약성이 쓴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오래된 나무는 달에서 왔다

달이 몸을 바꿀 때마다 은행나무의 수화는 빠르다
전하지 못한 말들은 툭 떨어지거나 노랗게 익어갔다
은행나무는 자라면서 달의 말을 하고
은행나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바닷물이 해안까지 차오르는 슈퍼 문일 때
남자는 눈을 감고 여자는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고 한다

오래된 나무의 우듬지는 800년 동안 달로 가고 있다

소래산 성주산 관모산 거마산을 거느린 장수동 은행나무
달빛이 은행나무 꼭짓점을 더듬는 농도 짙은 포즈
은행나무는 품을 여며 폭풍과 폭설을 견디는 새집이 되었다
큰 나무의 덕을 보아도 큰 사람의 덕을 못 본다는
무서운 격언을 새가 쪼아 먹을 때
뒷산까지 뿌리가 뻗은 은행나무를 뽑으면 산이 무너질까 봐
사람들은 새가 세 들어 사는 나무에게 빌었다

빙하기에도 살아남아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7월과 10월의 보름이면
은행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지아비 달이 걸린다

그때, 꿈이 많은 아이가 은행나무를 오르고 있다

[심사평]

 "활달한 어법·거침없는 상상력… 읽고나면 가슴이 두근"

팬데믹을 거치면서도, 불황의 늪에 빠지면서도 시심이 있기에 견디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경인일보 2024년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를 했다.

응모편수가 예년에 비해 줄지도 않았고 수준이 낮아지지도 않았다. 응모작품의 성향은 역사적이거나 문명의 진화이거나 하는 거대 담론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사유의 깊이가 보였다. 소소한 일상을 아름다운 서정의 그물로 건져 올리거나 내면의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아쉬운 것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시각이 좀 더 깊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시인은 사물의 보이지 않는, 숨겨진 특성을 살필 줄 알아야 감동이 살아 있는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작품들이 독자에게 감동과 전율을 준다.

​두 사람의 심사위원은 심사할 작품들을 택배로 받아서 우수한 작품들을 선정하는 예심을 거쳐 지난달 20일에 경인일보 심사장에 모여서 당선작을 조율했다. 열 분의 작품을 놓고 몇 번씩 돌려 읽으며 새로운 어법인지, 표절은 없는지, 시어들은 울림이 있는지, 본질에 닿으려는 노력이 보이는지 등을 검토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이 김문자의 '달로 가는 나무'다. 어법은 활달하고 상상력은 거침이 없으며 희망을 준다. 희망을 준다는 것이 중요하다. 발표지면이 새해 둘째 날이어서 그렇다.

​첫 행은 '달의 범람으로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다섯 개의 줄기로 자라는 은행나무의 품이 되었다'로 시작된다.

마지막 행은 '그때, 꿈이 많은 아이가 은행나무를 오르고 있다'로 되어 있다. 읽고 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당선자의 문학의 꿈이 까마득한 은행나무를 기어코 오를 것을 믿는다.

​김명인 시인 · 김윤배 시인

​[당선소감]

​"詩에 대한 갈증 느끼고파… 글로 빚진 자의 삶 살것"

당선 소식은 폭풍입니다.
한자리에 있지 못하게 만들고 무장해제 시킵니다.
헤실헤실 나오는 웃음은 눈이 되어 쌓입니다.

지금도 웃음은 눈으로 내립니다.
칼 조세프 쿠셀 말처럼 내가 웃어야 거울이 웃는다는 걸 보았습니다.
여고 시절 시를 품고만 있었지 싹을 틔울 줄 몰랐습니다.
품고 있던 시는 나를 천천히 깨웠고 시로 이끌어 주었지만
온 마음을 주어야 자라는 아이들이 곁을 비우면서
꺼내지 못하고 숨겨둔 시가 조금씩 올라왔습니다.
오래전 김영승 선생님의 시 창작반에 들어가 문우들을 만났고 동서양 고전과 인문학 강의에 매료되어 오래 정체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시삼백 사무사의 정신은 시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었습니다.
이별은 만남이고 만남은 다시 이별이며 하나를 버리면 하나가 어떤 형태로든 들어온다는 걸 알고
처음 시를 품었던 마음으로 시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어떤 인연으로 이담하 선생님을 만나면서 시는 온 천지에 있는 걸 느꼈습니다.
선생님의 격려와 때로는 신랄한 시평으로 기초부터 시의 확장과 사물을 다르게 보는 힘을 길렀습니다.
당선 소식에 저보다 더 좋아하시는 이담하 선생님,
몇 년 전 별이 되신 아버지,
시인이라는 이름을 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늘 재깍거리는 시의 시계를 보며 좋은 글로 빚진 자의 삶을 살겠습니다.
하늘의 아버지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김문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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