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2024] 알비노/최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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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노/최형만
빛을 본 적 없는 이들의
텅 빈 거리는, 마른 종이 같다
해질녘 길에서 엎드린 사람은
하얀 얼굴로 꿈을 꾼다지
바람이 숨죽여 우는 것처럼
엎질러진 노을의 흔한 표정도 없이
저녁도 하얗게 지는 거라지
빛의 소란을 평정하는 백색의 밤
통증으로 휘어진 길목마다
몽롱한 회색빛 언어가 따라왔다
불면은 몸의 바깥이어서
색을 찾아가는 혈류에 잠기면
먹구름도 무지개를 그릴 텐데,
뜨겁게 타오른 바람이 굴절되고 있다
한 떼의 컬러가 증발할 때마다
멘델이 나누는 우열의 방식은
멜라닌 색소로 흘러드는 새하얀 비명들
그늘로 가는 누군가를 보면
투명한 홍채로 걸어간 순례처럼
바짝 끌어당긴 어둠을 안고 있다
붉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트는 동안
진짜 꿈을 꾸고 싶은 사람들
작은 온기에도 날마다 타고 있다
* 유색 동물에서 날 때부터 피부나 머리카락, 눈 따위의 멜라닌 색소가 없거나 모자라는 것
[심사평]
시적 긴장이 팽팽한 작품
본심에서 숙독한 작품은 11명의 작품 35편이었다. 치열했던 예심을 통과한 만큼 응모작들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요즘 유행하는 시의 어법과 형식을 무리하게 끌어쓰는 경향이 강했다. 자기 시를 쓰지 못하고 검증된 시 쓰기에 편승하려는 모습은 우려스러웠다. 그런 시는 화자가 시의 언어에 끌려다니다가 결국에는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다.
얼마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용기 있게 자기 시를 쓰려는 작품을 앞자리에 놓았다. 그중에서 눈여겨본 작품은 「새점 봅니다」 외 4편, 「주말 극장」 외 2편, 「알비노」 외 2편이었다. 「새점 봅니다」는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시어들이 적재적소에 적중하고 있었다. 차분한 어조 속에 쉽게 휘어지지 않을 이미지의 뼈대를 감춰놓는 수법도 믿을 만했다. 그러나 일상의 순간을 스케치하듯 가볍게 그려나가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무심한 어법이 조금 더 팽팽하게 긴장했으면 좋겠다.
「주말 극장」은 화자가 시의 서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시상 전개가 활달하고, 언어의 내적 활력이 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함께 투고한 작품들도 소홀히 읽을 수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그러나 참신하거나 새로운 인지적 각성을 주지 못했다. 기성 시인의 시적 유전자가 너무 많이 발현된 건 아닌지 고민해보기를 바란다.
「알비노」는 시적 긴장이 팽팽한 작품이었다. 시어들이 종횡으로 충돌하는 힘이 좋았다. 언어를 운용하는 폭이 넓고, 그 넓이가 시적 사유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기성의 시 문법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아서 좋았다. 내적 서사가 좀 더 긴밀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앞으로 충분히 극복해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논의 끝에 「알비노」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인으로 첫걸음을 떼는 투고자의 시적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의 무게를 견디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용택 시인, 문신 우석대 교수
[당선소감]
돌아보면 어디서부터 걸었는지 모를 길을 걸었습니다. 열심히 걸어가면 뭐라도 있겠지 싶은 마음이었죠. 늦은 나이에 문창과에 들어가면서 바닥부터 다시 걸었습니다. 남들이 노후 자금을 생각할 때 시 한 줄 떠올리는 스스로가 못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역시나 타고난 천성은 버리지 못하는가 봅니다. ‘푸른 하늘’이라는 시제로 시를 쓰던, 이제는 까마득한 유년의 어느 날이 이제야 그 길을 찾은 듯합니다.
이 시를 구상하던 날은 그랬습니다. 무더웠던 여름날 산 중턱의 저수지였어요. 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볼까지 붉었는데 마음은 왜 그렇게 춥던지요. 크리스마스이브에 마침내 제가 사는 이곳에도 첫눈이 내리던 날, 다시 저수지를 찾았습니다. 볼에 닿는 산바람에 가슴이 기우뚱하는데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가고 싶은 길, 그 길이었습니다.
친구와 지인을 비롯해 감사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신춘문예공모나라」 문학 카페는 제가 수시로 드나드는 집과 같아서 그곳에서 편안했습니다. 더불어 오봉옥 교수(시인)님께서 바닥의 걸음마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축구에 진심인 교수님과 저는 통화를 할 때면 손흥민의 얘기로 한참을 떠들지만,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같은 길 위에 섰음을 압니다.
이 마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전북일보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름날의 저수지에 내려앉은 그 노을도요.
△ 최형만 시인
경남 진해 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문단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며 제8회 원주생명문학상, 제14회 중봉조헌문학상, 제13회 천강문학상을 받았다.
빛을 본 적 없는 이들의
텅 빈 거리는, 마른 종이 같다
해질녘 길에서 엎드린 사람은
하얀 얼굴로 꿈을 꾼다지
바람이 숨죽여 우는 것처럼
엎질러진 노을의 흔한 표정도 없이
저녁도 하얗게 지는 거라지
빛의 소란을 평정하는 백색의 밤
통증으로 휘어진 길목마다
몽롱한 회색빛 언어가 따라왔다
불면은 몸의 바깥이어서
색을 찾아가는 혈류에 잠기면
먹구름도 무지개를 그릴 텐데,
뜨겁게 타오른 바람이 굴절되고 있다
한 떼의 컬러가 증발할 때마다
멘델이 나누는 우열의 방식은
멜라닌 색소로 흘러드는 새하얀 비명들
그늘로 가는 누군가를 보면
투명한 홍채로 걸어간 순례처럼
바짝 끌어당긴 어둠을 안고 있다
붉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트는 동안
진짜 꿈을 꾸고 싶은 사람들
작은 온기에도 날마다 타고 있다
* 유색 동물에서 날 때부터 피부나 머리카락, 눈 따위의 멜라닌 색소가 없거나 모자라는 것
[심사평]
시적 긴장이 팽팽한 작품
본심에서 숙독한 작품은 11명의 작품 35편이었다. 치열했던 예심을 통과한 만큼 응모작들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요즘 유행하는 시의 어법과 형식을 무리하게 끌어쓰는 경향이 강했다. 자기 시를 쓰지 못하고 검증된 시 쓰기에 편승하려는 모습은 우려스러웠다. 그런 시는 화자가 시의 언어에 끌려다니다가 결국에는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다.
얼마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용기 있게 자기 시를 쓰려는 작품을 앞자리에 놓았다. 그중에서 눈여겨본 작품은 「새점 봅니다」 외 4편, 「주말 극장」 외 2편, 「알비노」 외 2편이었다. 「새점 봅니다」는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시어들이 적재적소에 적중하고 있었다. 차분한 어조 속에 쉽게 휘어지지 않을 이미지의 뼈대를 감춰놓는 수법도 믿을 만했다. 그러나 일상의 순간을 스케치하듯 가볍게 그려나가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무심한 어법이 조금 더 팽팽하게 긴장했으면 좋겠다.
「주말 극장」은 화자가 시의 서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시상 전개가 활달하고, 언어의 내적 활력이 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함께 투고한 작품들도 소홀히 읽을 수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그러나 참신하거나 새로운 인지적 각성을 주지 못했다. 기성 시인의 시적 유전자가 너무 많이 발현된 건 아닌지 고민해보기를 바란다.
「알비노」는 시적 긴장이 팽팽한 작품이었다. 시어들이 종횡으로 충돌하는 힘이 좋았다. 언어를 운용하는 폭이 넓고, 그 넓이가 시적 사유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기성의 시 문법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아서 좋았다. 내적 서사가 좀 더 긴밀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앞으로 충분히 극복해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논의 끝에 「알비노」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인으로 첫걸음을 떼는 투고자의 시적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의 무게를 견디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용택 시인, 문신 우석대 교수
[당선소감]
돌아보면 어디서부터 걸었는지 모를 길을 걸었습니다. 열심히 걸어가면 뭐라도 있겠지 싶은 마음이었죠. 늦은 나이에 문창과에 들어가면서 바닥부터 다시 걸었습니다. 남들이 노후 자금을 생각할 때 시 한 줄 떠올리는 스스로가 못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역시나 타고난 천성은 버리지 못하는가 봅니다. ‘푸른 하늘’이라는 시제로 시를 쓰던, 이제는 까마득한 유년의 어느 날이 이제야 그 길을 찾은 듯합니다.
이 시를 구상하던 날은 그랬습니다. 무더웠던 여름날 산 중턱의 저수지였어요. 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볼까지 붉었는데 마음은 왜 그렇게 춥던지요. 크리스마스이브에 마침내 제가 사는 이곳에도 첫눈이 내리던 날, 다시 저수지를 찾았습니다. 볼에 닿는 산바람에 가슴이 기우뚱하는데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가고 싶은 길, 그 길이었습니다.
친구와 지인을 비롯해 감사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신춘문예공모나라」 문학 카페는 제가 수시로 드나드는 집과 같아서 그곳에서 편안했습니다. 더불어 오봉옥 교수(시인)님께서 바닥의 걸음마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축구에 진심인 교수님과 저는 통화를 할 때면 손흥민의 얘기로 한참을 떠들지만,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같은 길 위에 섰음을 압니다.
이 마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전북일보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름날의 저수지에 내려앉은 그 노을도요.
△ 최형만 시인
경남 진해 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문단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며 제8회 원주생명문학상, 제14회 중봉조헌문학상, 제13회 천강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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