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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2024] 시운전/강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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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26회 작성일 2024-09-26 22:39:25 댓글 0

본문

시운전/강지수

​ 날 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아이치고 천성이 소심하다 했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 뭐예요?

 종합병원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발가벗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요

 그게 기억나요?

​ 최초의 관심과 수치의 흔적이 앞니에 누렇게 기록되었지요 나와 함께 태어난 앞니들은 백일을 버티지 못하고 삭은 바람에 뽑혀야 했지만, 어쩐지 그놈들의 신경은 잇몸 아래에 잠재해 있다가 언제고 튀어 올라 너 나를 뽑았지, 우리 때문에 너는 신문에도 났는데, 하고 윽박을 지를 것 같더란 말입니다

​ 횡단보도를 건너다 대大자로 뻗었을 때 혹은 동명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천성이란 무엇인지, 왜 어떤 흔적은 흉터로서 역할하지 못하고 삭아져버리는지

​ 당신, 당신은 한 번 죽은 적 있지요

 아뇨 아뇨 하고 뒤돌아 도망치다 보면

​ 잔뜩 눌어붙은 마음에 칼질을 해대는 것

​ 한 가지 알려줄까요

 무 이파리가 시들해서 죽은 줄 알고 뽑아보면

 막상 썩지는 않은 경우가 많답니다

 싱싱하지 않을 뿐

 살아는 있어요

 매운 향을 뿜으며

 가끔 손등을 깨물어요 그러면 삐죽 튀어나온 앞니 두 개가 찍힙니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어요

 내가 어딘가에 남길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자국이거든요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피부까지도

 저 멀리 보이는 친구를 피해 길을 돌아갈 때 혹은

 다시 태어나서도 나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할 때

 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천성

 나와 분리된 조각들에 대하여

​ 그리고 그리워하는 겁니다

 발가벗고도 이를 내보이며 웃었던 날


심사평

이미지를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는 힘이 거침없는 시운전

​이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게다가 자연재해와 인재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하늘하고 인간, 인간하고 인간의 아비규환 속 고통받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투고작들 속에는 이런 인간의 모습들을 그리려는 필사의 노력들이 펼쳐진다.

​중음신의 모습을 한 유령, 귀신, 고스트, 좀비 등과 유사한 다양한 형태의 변형된 인간을 창조하고 있다. 세상의 슬픔을 증언하려는 시의 지난한 몸짓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자 시의 본령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서사의 모호성과 현실 이후의 세계에 대한 전망(꿈) 부재가 시를 가볍게 한다는 점이다. 서정시의 퇴보와 상반된 인공지능 시대의 언어와 정서의 약진이 두드러지나 새로운 시의 전형을 창출하기까지는 도전과 시간이 얼마간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심사를 진행했다. 네 명의 심사위원이 응모작들을 나누어 읽고 네댓 작품씩을 뽑아 돌려봤다. 최종까지 거론된 작품으로는 강지수의 '시운전', 유가은의 '툰드라', 이상영의 '오늘을 돌려주려고' 등이다. 이상영의 시는 어조가 발랄하고 문장이 속도감이 있으며 단문의 조합이 경쾌하다. 다만 동원된 이미지들의 분열감이 시의 응집을 방해하고 있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유가은의 시는 가독성이 탁월하다. 경험을 시의 감각으로 전환하는 섬세함이 돋보인다. 하지만 비/눈, 사막/비옥한 땅, 삶/죽음의 거리 사이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는 의지를 다소 무리한 진술들이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선자들은 강지수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추호도 이견이 없었다. "날 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몇 천 분의 일의 선천치(natal teeth)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여정을 톺아내는 마음이 곡진하고 는 점을 높이 샀다. 사소한 사물일지라도 섬세한 시선으로 어루만지며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로 통합해가는 시적 완성도 또한 믿음이 갔다. 선자들은 모처럼 좋은 신인을 만났다는 마음을 서로 확인했다.
(심사위원 : 엄원태 안도현 안상학 나희덕)


당선소감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드는 시 쓰기 작업

출판 편집자로 약 3년간 일했습니다. 주로 예술서를 만들었어요. 예술 작품, 그리고 예술 작품을 다룬 이야기를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매번 설렜습니다.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드는 일. 만드는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고, 막연하게 꿈꾸었습니다. 마침 제게는 하고 싶은,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시로 뱉어낼 때 가장 즐겁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썼습니다. 쓰다 보니 운이 따랐습니다.

​저의 시에서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매일신문과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엄마, 김분숙 씨. 오래도록 기쁨을 주는 딸이 되고 싶어요. 늘 고맙고 미안한 동생들 영훈 지호. 너희들이 자랑스러워. 나의 엄마를 든든히 지켜주는 아저씨, 마음 깊이 감사합니다.

​저의 또 다른 어머니이자 늘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어머님, 그리고 아주버님. 감사드려요. 건강하세요.

소중한 친구들아. 나의 10대와 20대가 너희들 덕분에 즐거웠다. 앞으로도 함께 엉뚱한 짓 많이 하자. 특히 지혜, 현지. 나의 기쁨을 너희들의 기쁨처럼 여겨주어서, 한꺼번에 몰아닥친 행운에 짓눌리지 않고 숨을 쉴 수 있었어.

재희. 사랑하는 재희.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작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카뮈의 '이방인'을 읽어보라고 내게 추천해주었지. 문학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나는 그 책을 읽고 나서야 어렸을 때 방학이면 혼자 버스 타고 가던 동네 도서관의 책 냄새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어. 내가 글을 쓰게 된 건 모두 당신의 덕분. 우리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자.

열심히 쓰겠습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속이지 않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지수 시인
1994년 서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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