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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4] 여기 있다/맹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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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90회 작성일 2024-09-26 23:12:3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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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다/맹재범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에 맺혀 있다가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다
 투명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이 없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분주히 주변을 지나친다
 나를 통과하다 넘어져 뒤를 돌아보곤 다시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당신의 눈빛을 되돌려줄 수 없지만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이 있다

 간판과 자동차와 책상과 당신의 어깨까지
 모든 것을 적실 만큼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심사평]

밖으로 내몰린 존재가 여전히 있다는 믿음이 ‘여기 있다’

​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인 세밑을 지나며 지난 한 해를 가만히 돌아본다. 유독 버겁고 힘겨웠던 한 해였음을 신춘문예 시 응모작들을 읽으면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와 포스트휴먼의 감각을 드러내는 시는 작년에 이어 여전히 강세를 보였지만 눈에 띄는 새로운 경향으로는 삶의 고단함을 드러내는 시들이 많아졌음을 언급해야겠다. 전세사기나 택배 노동, 청년 문제 등을 다룬 시의 출현은 현실의 고단함이 여전히 시의 동력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이 출구 없는 막막한 일상을 견디는 데 작은 버팀목이나마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모작들을 읽었다.

  응모작들 중 눈에 띄는 네 명의 작품을 두고 오랜 토론이 이어졌다. 논의의 장에 올라온 시들은 ‘해파리와 사랑’ 외 4편, ‘수목’ 외 4편, ‘서빈백사’ 외 4편, ‘여기 있다’  외 4편이었다. 각자의 시적 개성이 뚜렷하고 장점이 분명한 시들이었다. 머지않아 이분들의 시를 지면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해파리와 사랑’  외 4편은 목소리의 색깔과 태도가 분명한 점이 매력적이었다. 개성적인 목소리라는 점에서 매혹적인 면이 있었으나 응모작들의 결이 유사한 점은 다소 아쉬웠다.  ‘수목’ 외 4편은 마지막까지 거론된 응모작들 중 젊은 감각으로 현실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띄었다. 상실의 경험과 애도의 감각을 그린 ‘수목’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보여준 ‘도시의 두 블록을 태연히 돌아 나왔다’ 두 편 모두 인상 깊었다.  ‘서빈백사’는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시였다. 마지막 선택의 순간까지 고심을 거듭했다. 긴장을 느슨하게 만드는 마지막 두 연이 없었다면 운명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응모작들 간에 편차가 있는 점도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세 분의 시는 당장 지면에 발표되어도 손색이 없는 좋은 시들이었다. 실망하지 말고 정진해서 조만간 지면에서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  당선작으로 최종 선택된 ‘여기 있다’는 투명인간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생활의 감각으로 어떻게 변용해 시적인 순간을 발명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사라짐을 노래한 시는 많았지만, 당선작은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던 “나는 투명인간”이라는 선언을 통해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고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음을 담담히 보여주었다. 이 시의 고요한 단단함을 심사위원들은 믿어보기로 했다.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처럼 시도 그렇게 “여기에 있” 음을 믿어보고 싶게 하는 시였다.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 중 ‘물사람’과 ‘일요일’도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응모작들이 고른 완성도를 지니고 있어서 오래 시를 써온 사람의 내공이 느껴졌다. 새로운 시인의 출발을 함께 기뻐하며, 시를 읽고 쓰는 고통의 시간에 차오르는 즐거움을 전해준 응모자들에게도 지지와 응원의 마음을 건넨다.

심사위원 송경동·이경수·진은영·황인숙(가나다순)

[당선소감]

오래 걸리더라도 기어이…‘일용할 양식’이 되는 그날까지

  사골을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뺍니다. 팔팔 끓는 물에 사골을 담그면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불순물들이 올라옵니다. 밑이 넓은 국자로 기름과 불순물들을 건져내며 오래오래 육수를 우려냅니다. 뽀얀 육수가 올라올 때까지 불 앞에 오래 머무릅니다.

  제가 그 과정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직 차가운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래 걸리더라도 기어이 따뜻한 한 끼가 되려 합니다. 새벽과 저녁이 익숙한 모든 사람이 제 은인입니다.

  내 안에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서 고맙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름을 부르기도 미안한 친구들과 선생님, 아버님, 어머님, 가족들 너무 많은 고마움을 떼어먹으며 버텨온 것 같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 영희, 우리가 늘 하는 농담처럼 꼭 갚아줄게!

  엄마, 엄마 아들로 태어난 게 무엇보다 큰 행운이었음을 말하고 싶어.

  너무 뛰어난 사람은 하늘이 먼저 데려간다는데, 천국의 제일 목 좋은 자리에서 길게 늘어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을 아빠, 아빠 옆에는 충무떡볶이 할머니랑 인제약국 아저씨랑 홍어아저씨랑 이모랑 큰아버지랑 대웅이랑 다 있겠지요? 늘 아빠 산소 앞에 가서 서글퍼하다만 와서 죄송해요. 이번엔 아빠 산소에 예쁜 꽃이랑 좋은 술 사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부끄러움 말곤 자랑할 게 없는 저에게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맹재범 시인
1978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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