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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신문] [2023]당산에서/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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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81회 작성일 2024-11-14 14:34:0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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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에서/신나리

비 오는 새벽 요강을 몇 번이나 비워낸 할머니는 내가 잠에서 깰까 아침이면 부엌에 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약을 많이 먹어 몸에서 쓴 내가 났다 나한테는 미묘한 매실 냄새가 비가 퍼붓는데도 두 냄새가 멈추지를 않았다

푸른 논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뚫린다던 엄마는 절대 할머니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시골에 살면 우울증에 걸린다나 나 어릴 때 친구 하나가 너희 엄마 불 꺼진 매장에 혼자 앉아있더라 전해 준 적이 있다

할머니는 방에 걸린 무수한 액자들과 함께 살고 있어 나는 양심이 없으므로 엄마에게 몇 마디를 했다 얼마나 불쌍한지 외로운지 결국은 심심한지 할머니가 엄마는 고집 있고 성질 나빠 아빠랑 살기 어려웠을 거래 우리는 웃다가 콧물을 흘렸다

다음날 어떻게 잘 지낼지 생각하느라 도통 밤에 잠을 못 잤다 희망을 벗어날 길 없어 욕망을 추스를 틈 없이 이른 아침 아이돌 노래에 맞춰 산책하다 고추밭에서 누군가 칼로 난도질한 복권 여러 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죽은 삼촌 방에 앉아 뭘 하는지 할머니는 모른다 노래기 잡고 거미랑 싸우며 그냥 해보는 데까지 해 보는 겁니다 이를 갈면서도 이를 숨기느라 진을 빼고

같이 목욕을 하자더니 결국 혼자 손으로 몸을 문질러 닦았다 나가 있으래서 나가 있었다 할아버지 생전에 할머니가 비누로 씻고 밥을 차리면 비위 상해서 못 먹겠다고 상을 물렸다고 한다 그깟 소리 듣기 싫어서 그때부터 물로만 문질러 닦았다는데

이도 없고 밥 먹고 솟아야 할 기력도 권태도 없어 보이는 할머니와 저녁을 먹는다 기름친 음식이 먹고 싶어 우유에 탄 진한 커피도 마시고 싶어 죽겠는 와중에 어김없이 체한다 할머니가 내 커다란 배를 문질러 준다

늙은 엄마를 사랑하지 못할까 눈물 찔끔 흘리는 내게 희망이 절망이 될까 한 글자 쓰는데 벌벌 떠는 내게 마을의 수호신 장승처럼 너무나 큰 할머니 끈질긴 여름밤 비는 쏟아지고 미물들이 발광을 한다

할머니 옆에 꼭 붙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 우뚝 선 자존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당선기사 및 소감 | 신나리

"멋부릴 줄 몰라 솔직하게 쓴 시…더 많은 사람들에게 와닿았으면"

“정말 놀랐어요. 사람들이 그랬거든요. ‘나리야, 네 시는 등단용이 아니야’. 어디에 당선될 만한 전형적인 시가 아니라는 뜻이었죠. 나를 잘 아는 친구들 말고,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내 시를 읽고 좋아해 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2023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인 신나리 씨(32)는 “내 시가 더 많은 사람에게 와닿을 수 있겠구나 하는 용기를 얻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연세대 문화인류학 박사과정을 1년 다니고 휴학 중인 그는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신춘문예 한 곳에 원고를 투고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 생애 두 번째 신춘문예 도전이 한경 신춘문예였다.

​“어디에 넣을까 하고, 여러 신문사 당선작을 봤어요. 작년 한경 신춘문예 당선작인 박규현 시인의 시가 좋았습니다. 심사위원이던 김이듬 시인의 이름도 눈에 띄었죠. 저와 결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시는 본심에서 심사위원들(김사인·손택수·진은영 시인)을 고민에 빠뜨렸다. “진심은 느껴지지만 너무 솜씨를 안 부려 나태하게 보일 수 있다”는 염려가 나왔다. 하지만 “자꾸 정이 간다”고 했다. “훌륭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는 평가도 나왔다.

당선작 ‘당산에서’는 수필 같은 시다. 시골 할머니 집에 머무르며 느꼈던 감상을 일상 언어로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 흔한 시적 비유와 은유도 없다. 평범해 보이는 문장들 속에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의 마음에도 울림을 주는 힘이 숨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해야 시를 멋지게 쓸 수 있는지 몰라요. 시적 기교를 부릴 능력이 없는 거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겸손에 가깝다. 어려서부터 문학이 좋았던 신씨는 이화여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대학원에선 한국 현대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평생 문학과 함께하겠다고 생각했다.

2016년 불거진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사태는 큰 배신감으로 다가왔다. 그는 “더 이상 문학을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했다.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보호해주는 게 문학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있었던 거죠. 까무러치는 심정이었습니다.”

​한동안 시 쓰기를 멀리하던 신씨는 2019년 대학원 졸업 후 1년 반 동안 학원 강사 일을 하며 다시 펜을 들었다. ‘1주일에 한 편은 써야지’라며.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에 찾은 전북 부안의 할머니 집에서 1주일가량 머물며 쓴 시가 ‘당산에서’다. 그는 “최근 문득 그 시가 다시 생각났다”며 “날 것의 느낌이 강했던 원래의 시를 정연하게 고쳐 신춘문예에 냈다”고 말했다.

​그가 쓰고 싶은 시는 ‘만남의 장’으로서의 시다. “저는 시를 쓸 때마다 엄청 울어요. 속상하거나 힘든 일, 남에게 하기 힘든 이야기를 시로 써요. 그래서 등단용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죠.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나니 제 시가 만남의 장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제 시를 통해 복잡하고 힘들고 심란한 마음을 잘 풀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태원역서 마주한 기도하는 이들…문학으로 위로할 것"

​엄마랑 동생이랑 오빠들이랑 노래방 갔다가 돌아오는 길 동물 사체가 있고 폐우물이 있었다. 블로그 이름을 우물에 빠진 날로 짓고 폐우물 사진을 걸어 두었다. 아빠와의 싸움을 매일 적었다. 조그만 친구들이 우물을 보러 와 자주 앉았다 가곤 하였다. 우리에게 우물이 있어서.

​점잖지 못하게 괜히 들여다보고 귀를 기울이던 날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니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자연히 생겼다. 회복이 어렵다는 걸 잘 생각하려고 노력하였다. 가슴에 우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한 번 누를 때마다 더 깊어지는. 그곳에 나를 내려 두고 오면 된다. 우리는 호흡할 수 있다.

나는 시를 존재라고 느끼고 있다. 탐욕의 얼굴을 한 시를 본다. 이 세계를 이해해 보려다 피눈물을 흘리는 시를 본다. 얼마 전 이태원역에 갔다가 기도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마주하였다. 이 존재를 사람들 곁에 세워 현실을 살게 하겠다. 책임감을 가지고 쓰겠다. 외롭지 않은 문학을 만들겠다.

​사랑으로 늘 꽉 껴안아 주는 나의 연인 슬, 채현, 아미, 진영, 혜인에게 고맙다. 언어를 통한 만남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준 나의 벗 윤원, 지원, 선빈에게도 고맙다. 날 고독하고도 풍요로운 인간으로 길러 준 가족들에게, 또 하나의 집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선생님들께도 감사하다.

​언제나 도망칠 궁리로 가득 차 있던 나를 계속 바라봐 주신 정끝별, 안미옥 선생님께, 혼자 걸어가던 나의 시를 불러 세워 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평 | 김사인 손택수 진은영 시인

​"할머니·어머니·나로 이어지는 여성…서사의 저력 육화한 수작"

시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낯선 언어와 다른 시선뿐만 아니라 이미 익숙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정서들을 재배치하는 데서도 온다. 먼저 ‘새들의 주식회사’는 말과 이미지를 빚어내는 제작술이 돋보였다. 동봉한 작품들의 수준 또한 두루 균질한 편이어서 신뢰할 만했으나 완성에 급급한 나머지 시적 공간이 더 확장되지 못하고 발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래된 습관’ 외 네 편은 당대의 그늘진 삶을 다루면서도 활달한 어조와 아이러니한 맥락 속에서 시상을 곱씹게 하는 힘이 있었다. 다만, 함께 읽은 작품들에서 탈골하듯 드러나는 비유의 도식성은 숙고를 요청하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당산에서’ 외 네 편은 자기 안으로 함몰되지 않고 타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몸과 마음을 돌리는 시적 운동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당선작은 할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지는 여성 서사의 저력을 육화한 수작이다. 독백이나 넋두리 수준의 사담에 연루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그 또한 상투화된 기우로 만들어줄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우리는 기꺼이 시인의 모험에 함께하기로 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의 공덕이 부식토로 깔려 있음을 잊지 않고 정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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