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드라이아이스/민소연 > 신춘문예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오늘
176
어제
418
최대
3,544
전체
229,699
공모전
  • H
  • HOME 공모전 신춘문예
신춘문예

 

[세계일보] [2023]드라이아이스/민소연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이창민 조회 79회 작성일 2024-11-14 14:42:28 댓글 0

본문

드라이아이스/민소연

- 결혼기념일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 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러붙었다








당선소감 | 민소연



"부족함 많은 글 가능성 열어줘 감사합니다"



문득 거울 속에서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가 있다. 글을 쓰겠다는 건 그런 거울을 자꾸만 닦겠다는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 들 때면 그날의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고 나면 나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고, 더는 그 기분이 낯설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는 내가 들어 있지 않은 글을 썼다. 나와 같은 감각을 공유하는 인물만이 거기 있었다. 나의 글 속에서 나라고 우기는 인물들이 나 대신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글을 시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내가 시라고 부르는 것들이 나 혼자만의 꿈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에 덜 깬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졸음이 한 번에 달아났는데도 도통 정신이 또렷해지지 않았다. 조금 전 꿈에 있을 때보다도 실감이 안 났다. 축하해주시는 기자님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감사 인사를 드렸다.



 부족함 많은 글에 가능성을 열어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덕분에 나의 글이 혼자만 믿는 꿈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기로만 남을 수 있던 글을 믿고 시가 될 수 있게 만들어준 이희진 선생님과 시를 통해 더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 장석남 교수님, 권혁웅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나보다도 나의 글을 의심하지 않고 응원해주며 매주 스터디를 함께한 우리 학교 언니들과 친구들에게도 감사와 응원을 전한다. 당선 소식을 알고 “내가 된 것도 아닌데 손이 다 떨린다”면서 기쁨을 함께해준 친구들을 비롯해, 당선의 기쁨만큼이나 축하의 기쁨으로도 가득하게 해준 모든 분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매번 나의 선택을 믿고 지켜봐 준 가족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심사평 | 안도현 유성호

"착상·비유 안정적 구현… 서늘한 감각 탁월"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작품이 응모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러 편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공력과 시간을 쌓아온 성과라는 데 공감하였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타자들을 관찰하고 해석한 결실도 많이 보였고,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아 내면의 정직한 기록이 되게끔 한 사례도 많았음을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는데, 김운, 노수옥, 민소연씨가 그분들이다. 오랜 토론 끝에 결국 민소연씨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김운씨의 ‘여름의 앙카’는 흰 눈과 붉은 꽃의 색상 대조가 고양이와 말의 상상적 모자이크를 뛰어난 감각적 이미지로 승화하는 데 기여하면서, 충격과 반응으로 연쇄해가는 감각 운동이 진정성과 독자성과 연관성을 두루 지니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노수옥씨의 ‘가난한 접시’는 밀도 높은 기억과 표현이 마지막까지 특징으로 거론되었다. 오랜 향기와 시간으로 둘러싸인 아버지의 접시를 다룬, 구체적 기억 소묘의 집중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민소연씨의 ‘드라이아이스’는 전언의 구체성과 표현의 개성, 착상과 비유의 구현 과정이 매우 안정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되었다. 특별히 드라이아이스가 가진 물리적 속성과 사랑의 제도적 결실인 결혼의 상징적 속성을 연동하면서 펼쳐낸 희뿌옇고 서늘한 감각이 탁월하게 다가왔다. “영원한 타인”과 살갗이 들러붙는 과정을 발견한 순간이야말로 ‘결혼기념일’의 가장 큰 페이소스이자 빛나는 선물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당선작으로 뽑히지는 못했지만, 저마다의 개성적 언어로 자신만의 언어적 성채를 이룬 경우가 많았음을 덧붙인다.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드린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