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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안] 어둠을 열다-청량리에서 남영역까지/이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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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22회 작성일 2023-06-19 21:46:0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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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열다-청량리에서 남영역까지/이슬안

오래 묵은 서랍을 정리하는데 코끼리 한 마리 누워있다 언젠가 태국에서 사 왔던 코가 반쯤 부러지고 눈 하나 빠져 뒤집혀 있는, 코끼리는 맘모스백화점을 닮아 있었다 청량리 로터리 황량한 정글에서 서민들의 주머니 풀을 뜯으며 연명했던 백화점, 커피숍은 주말마다 맞선 보는 사람들로 붐볐고 창문 밖 붉은 네온사인 아래 여자들은 경찰처럼 두리번거리며 낚아챌 누군가를 찾았다 버스를 기다리던 단발머리 내 귓불에 대고 어린놈이 “냄비씨!” 소리치고 도망갔지만 ‘렛미씨?’로 알아듣던 나는 코끼리 등을 타고 다니며 어느새 파마머리 대학생이 되었다

코끼리 닮은 맘모스는 세습 밀렵꾼들에게 상아를 잘린 끝에 고꾸라졌다 청량리역에서 남영역까지 지하터널을 오가는 몇 년간 나의 청량리는 파괴된 밀림이었다 지하철 입구에서 가방을 낚아채 밑구녕까지 뒤지며 불온 전단을 찾던 까까머리 전경들은 제대 후 데모대열에 끼어들 동년배들이었다 금서처럼 숨겨 둔 생리대가 보이기라도 하면 불온한 비밀을 들킨 여자가 된 것 같았던, 청량리 지하에서 시작된 긴 암흑을 지나 지상으로 오르는 첫 번째 역, 남영은 강렬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주변의 모든 소음을 삼킬 만큼 덜컹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남영역 철로 밑 낡은 경양식집에서 돈가스와 생맥주로 청춘의 허기를 채우곤 했던, 미팅이 있던 날은 카페와 술집을 전전하다 철로에 반사된 빛에 일순 애꾸눈이 되어 서로의 눈길을 낚아채는데 몰두했다 근처 건물에 물고문으로 죽어간 동년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암흑을 뚫고 올라온 지상 첫 번째 역 선로에선 기차가 지날 때마다 억! 억! 거리는 비명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날엔 청량리 로터리로 바람이 몰려들었다 짙은 립스틱을 바른 또래 여자는 더욱 거세게 남자의 팔을 잡고는 붉은 등 아래 지상낙원에 눕혔다 여자의 가는 손목에는 은팔찌가 끼어져 있었다

코끼리 인형 아래로 팔찌가 보인다 ‘Friendship’이 또렷이 박힌 검게 변색 된 은팔찌, 우정은 허망한 입김에 쉽게 변하는 것, 기억의 소실점 근처에 살던 운동권 친구는 학교를 관두고 공장으로 가기 전 끼고 있던 팔찌를 나에게 주었다 팔찌가 사라진 친구의 여린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는 사실을 오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서랍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청량리 로터리는 쓸쓸한 사람처럼 늘 바람을 끼고 살았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먹구름처럼 우울했다 배고픔에 쥐를 먹어 입술이 붉던 여자들과 불온을 줍기 위해 가방을 뒤졌던 청년들, 이성의 눈에 들기 위해 서투른 칼질을 했던 대학생들과 어금니 꽉 물고 여전히 변두리를 전전하는 운동권 친구가 뒤섞여 붉은 비 내리는 서랍 속 80년대 하늘, 서랍을 빼 들고 밖으로 나가 돗자리 위에 그들을 쏟아 놓는다 같이 앉아 맑은 공기 한번 쐬지 못한 또래들 옆에 가만히 앉는다

[이 게시물은 이창민님에 의해 2025-03-31 15:13:39 이미루의 시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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