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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칡꽃/곽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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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6회 작성일 2025-06-17 21:39: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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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꽃/곽재구

지리산 아래 토지면에서는
지금쯤 칡꽃이 미치게 피어나고 있지
배꼽에 땟물 습한 산그늘 내린 채로
우리들은 칡 한 뿌리를 물고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로 달렸지
생각나거든
보리밥알 같은 초가집들이 황토 위에 묻어 있고
호박마름 꼬챙이가 흙벽 위에 붙어 있고
동구에 들어서면 보리떡 들쑥 냄새가
고픈 배를 적셔놓았지
참숯 같은 얼굴로 동네를 떠난 누님들은 알까
써레질 헛간 깊숙이 팽개친 형님들은 알까
칡물이 검게 오른 입술로
단물 빠진 수숫대를 꼭꼭 씹으며
우리들이 울컥 삼키던 어지러움
칡꽃이 하늘 끝까지 피었는데
달리고 달려 꿈속까지 환하게 피었는데
언제 올지도 모르는 일가 형님들을 기다리며
버스가 들어오는 장터까지
우리들은 달리기 시작했지
횟배 앓은 가슴께로 칡꽃들은 날아들고
헛구역질 가쁜 숨으로 수수밭에 쓰러지곤 했지
미칠 듯 기다리는 우리들마저
칡꽃 눈물나는 산그늘을 배반하고
지금은 십장녀석이 주장하는
작업량을 어림으로 계산하며
공사장 십이층 난간에서
쓴 담배를 피운다
입술에 칡물이 배어들도록
꺼멓게 꺼멓게 속을 태운다.

- 『沙平驛에서』(창작과비평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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