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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문학동네』 신인상 - 임유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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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butand5 조회 877회 작성일 2021-10-13 01:15:2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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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모자 하나가 멀리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걸 보았다. 가벼운 짚으로 만든 모자 같았다. 크기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챙이 크지 않아 보였다. 리본이나 꽃 장식도 없었다. 끈이 달렸는지 모르겠다. 크만큼 시력이 좋지는 않았다. 아케이드의 마네킹 위에 모자가 얹혀 있으면 나는 그것들을 약간 두려워하며 지나친다. 모자는 사람을 상상하게 만든다. 특히 누군가의 머리를. 머리 중에서도 이마를, 땀이 맺힌 이마. 주름이 잔뜩 진 이마. 검버섯이 가득한 이마. 이것은 뙤약볕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내 조모의 이마. 조모께서는 결코 모자를 쓰지 않으셨다. 그것이 얼마나 여성답지 못한 일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수근거렸지만, 조모는 개의치 않으셨다. 옅은 이맛빛 잔털로 살짝 덮임 조그만 이마. 이건 내 조카의 것이다. 조카의 머리통은 덜 여문 배를 억지로 나무에서 따온 것처럼 생겼다. 그애는 늘 머리에 꼭 맞는 모자를 쓰고 외출한다.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조모님을 모시고 이 호숫가에 온 것은 이십여 년 전이다. 조식을 마친 뒤 온 가족이 조모님을 부축해 가벼운 산책을 나섰다. 호숫가로 밀려온 물이 뭍에 닿을 때마다 흩어지고 다시 밀려갔다. 조모님이 중얼거리셨다. 바다......바다......바다......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이 파도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아침

  오년 전 나는 호수에 한 번 뛰어들었다. 아무 준비 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출렁다리는 출렁거렸고, 내가 뛰어내리거나. 말거나.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코를 꼭 쥐고, 눈을 감고, 다른 한 손 끝과 양발 끝을 힘주어 모으던 짧은 순간에, 어, 이건 제대로가 아닌데, 생각했고,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는 문장은 다시는 실제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입고 있던 흰색 반바지와 베이지색 티셔츠 대신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휴양지의 병원 응급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지나치게 격정적인 바이올린 연주.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고 머리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지끈거렸고. 다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을 끔벅. 감았다 뜰 때마다 보이는 흰 것들. 그것들은 긴 벌레처럼 움직였다. 호수에 사는 커다란 기생충이 내 눈알 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나를 발견했다는. 얼굴이 새카만 남자가 멀리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크게 웃었다. 박수를 짝, 짝, 짝 치더니 주먹을 쥐고 허공을 흔들다가. 기지개를 켜며 뒤돌아 떠났다. 마치 아주 대단한 일을 완료한 사람처럼. 자신이 한 일에 흡족한 듯 보였다. 그가 떠나고 내 몸에 커다란 기저귀가 채워진 걸 알아차렸다. 더듬어보니 탐폰이 없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제거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저희도 시스템이라는 게 있다고, 무뚝뚝한 간호사는 반복할 뿐이었다.

 아침

​  새 아이보리 비누를 뜯어 세수했다. 가방에서 튼튼한 주머니 두 개가 달린 푸른 면직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양 소매 끝에 자개로 만든 단추가 세 개씩, 등뒤에 두 개가 달려 있는 옷이다. 단춧구멍이 너무 작아 끼울 때마다 고생스러웠다. 그러니 풀어지지도 않겠지. 누가 일부러 잡아 뜯지 않는 이상. 양말은 연회색 실크 양말을 가져왔다. 검은 구두는 어젯밤 미리 닦아두었다. 구두가 푹 젖을 생각에 조금 울적해졌었다. 비 오는 날엔 결코 신지 않았던 양가죽 구두.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구두. 졸업식에도, 처음 피어노 연주를 들으러간 공연장에도, 부유하지만 엄청나게 부자는 아닌 친구들을 만났던 시내의 식당에도 신고 갔던 것. 유치한 장식은 없지만 은근히 굽이 높은 구두. 굽의 바깥쪽마다 색이 열게 닳았다. 굽은 두 번 갈았다.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더 빨리 닳곤 했다. 구두방에 갈 적마다 멋쩍었다. 나는 오른쪽으로 더 기울었답니다. 혹은, 저는 왼쪽으로 더 기울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오른쪽으로 기울었던 중 만났던 사람들. 왼쪽으로 스쳐지나갔을 모르는 사람들. 사람들? 말하고 싶지 않다. 고백하고 싶지 않다. 최종 끝. 끝의 끝으로 간다. 가고 말 것이다.

  거울 속에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다. 긴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고. 나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들고자 했던, 아무 의미를 담지 않고자 했던, 저 갈색 눈동자. 밤의 겉껍질을 둥글게 오려붙인 듯한. 비밀을 간직하고자 했던. 두 개의 논. 죽은 사람에게도 비밀이 있을까? 죽음은 비밀일까? 폭로일까?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시체, 시체에겐 비밀이 없다. 시체는 폭로일 거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폭로. 아무래도 머리는 하나로 묶는 것이 좋겠다. 발견될 때를 대비하면 그쪽이 낫다.

아침

 오믈렛. 한데 섞인 흰자와 노른자의 중립적인 맛. 사각사각 십히며 풋내를 살짝 풍기는 피망의 향기. 아주 잘게 썰린 햄의 질감과......버터. 강렬한 버터의 향기. 불에 충분히 달궈진 버터와 부드러운 달걀의 신비로운 조화. 신적인 것. 강렬한 것. 달걀과 불과 기름, 약간의 소금과 후추. 그러나 어떤 비법에는 아주 적은 양의 설탕이 포함되기도 하는데, 마치 독약의 이로운 활용법처럼. 설탕이 독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순수한 설탕의 혐오자들은 의사가 아니라 알콜중독자들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단맛을 싫어하다못해 거기에 반대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달콤한 것은 오직 술이면 족하다는 듯이. 그러나 그들은 모르지. 아침의 오믈렛에, 짭짤한 비스킷에, 심지어 튀김옷 반죽에도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설탕. 설탕을 잽싸게 뿌려 넣는 어떤 사람의 손. 아침을 만드는 사람의 손. 안주를 만드는 손. 여자. 여자의 손. 묶인. 찔린. 찢긴. 손. 희고 검고 누럼 세계의 손. 여자가 가진 손. 레이디스 핑거. 쿠기의 이름. 알코올 중독자 중에도 여자가 많은데 누군가 그들에겐 각별히 키친 드링커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내 위장을 들여다볼 검사관은 술을 아주 많이 마시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알코올 중독자라면 더할 나위 없다.

 아침

​ 간밤에 바에서 가벼운 프로세코를 한 병 주문했다. 산듯하고 청량했다. 천천히  두 잔을 마신 뒤에 아페롤과 칵테일 글라스를 청했다. 글라스에 아페롤을 약간 따르고 거기에 프로세코를 가득 채웠다.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초여름의 휴영지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다. 프로세코가 다 떨어져서 우아한 동작을 즐겁게 감상했다. 샴페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 나가니 호숫가의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스민 향기와 잔디 깎은 냄새, 물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 호수 위로 잔물결이 부서진 샹들리에처럼 반짝였다. 완벽한 밤이었다. 체라스 난간에 올라가 그대로 떨어지고픈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충동을 억누르느라 애쓰던 중 내가 취했음을 깨달았다. 옷깃을 여미고, 글라스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종업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자 나의 갈색 트렁크와 푸른 원피스, 잘 닦아둔 검은 구두가 그대로 잘 놓여 있었다. 창밖에서는 아직도 호수의 물결이 반짝이고 있었기에 나는 책상 위의 펜을 집어 글을 쓸 뻔했다. "나는 매번 무거운 문을 밀면서 왔습니다......" 지금 내 앞에는 빈 종이가 한 장 있을 따름이다.

 아침

  손목시계를 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시계는 내가 가진 가장 무거운 금속일 것이다. 얼핏 보면 번쩍이는 금팔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황동으로 만들어 저미도록 얇은 금박을 입힌 시계다. 나는 과시적인 장신구를 좋아하지 않지만 유행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는다. 크고 빛나는 것을 목, 귀, 손가락에 전부 휘감는 대신 팔목에 하나 정도 걸기. 이것이 내가 유행을 따르는 방식이다. 치장의 욕구는 내가 잘 조절해온 충동의 하나다. 갑싼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 죽임당한 여자 대신 죽음을 선택한 여자로 보였으면 좋겠다. 이상한 일이지. 장신구를 사는 데엔 돈이 든다. 고귀한 여자는 돈을 쓰지 않는가? 성모님이라면 돈을 쓰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성모상은 얼마나 화려한가! 성모님도 죽은 여자라고 볼 수 있을까? 죽어도 죽지 않는 여자라고 해야 하나. 나도 집에 성모상과 초로 꾸민 간이 제단을 갖추고 있지만, 이제 초를 밝히고 성모께 기도를 드리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깊은 강바닥에서 댐을 만드는 수부들은 납덩이로 만든 허리띠를 찬다고 한다. 시계를 찬들, 허리띠를 찬들, 내게 손목이나 허리가 남아 있으려나.

 아침

  멀리서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린다. 빨강, 파랑, 노랑 색색의 공들이 높이 떠오르고 떨어지고, 아이들은 얕은 물에서 놀고 어른들은 호숫가에서 일광욕을 한다. 그토록 조용히던 밤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쏟아내다니. 그래 나는 해가 뜨지 않는 아침을 찾으려 이곳에 왔지. 숱한, 헛된 밤을 따라온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듣는다. 양산을 쓴 숙녀들의 속삭임도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깨끗하고 예쁜 조약돌을 찾아 주머니에 넣는다.

 아침

  나에 관해서라면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곧 누군가는 알아차려 주리라. 얼마나 지나야 할까? 누군가. 누구일까? 여러 명일까? 단 한 사람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남자일 것 같다. 그이는 뜨내기 순정일까. 별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젊은 남자일까. 물론 산전수전 다 겪었을 수도 있지. 상관없다. 아니, 상관있다. 나는 죽은 자의 얼굴을 하고 있겠지. 죽은 장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죽은 자의 얼굴이겠지. 틀림없이. 그는 눈썹을 높이 들어올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꿀꺽 삼킬까. 경험이 많은 중년의 경감일지도 몰라. 수영을 잘하는 어린 아이라면 어쩌지? 엄마 심부름을 끝내고 한달음에 호숫가로 달려와 옷을 벗어던지고 날씬한 전갱이처럼 헤엄치던 아이라면 어저지. 그 애가 여자애라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달려! 전속력으로 뛰어가렴. 가가운 건물 쪽으로. 옷은 되도록 주워 입고. 네가 발견한 끔찍한 광경을 가장 먼저 만나는 어른에게 알리렴. 너는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주저앉을 지도 모른다. 괜찮아. 털어놓은 다음엔 되도록 빨리 잊어. 전부 잊어버려. 친구들에게 너의 무용담을 자랑하며 떠벌려도 좋다. 그럼 더 빨리 희미해지겠지. 이보다 더 무섭게 만들 수는 없을 거야. 걱정 마. 금찍한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고, 모두 잊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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