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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한경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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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41회 작성일 2023-01-03 17:25:4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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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에서


비 오는 새벽 요강을 몇 번이나 비워낸 할머니는 내가 잠에서 깰까 아침이면 부엌에 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약을 많이 먹어 몸에서 쓴 내가 났다 나한테는 미묘한 매실 냄새가 비가 퍼붓는데도 두 냄새가 멈추지를 않았다

푸른 논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뚫린다던 엄마는 절대 할머니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시골에 살면 우울증에 걸린다나 나 어릴 때 친구 하나가 너희 엄마 불 꺼진 매장에 혼자 앉아있더라 전해 준 적이 있다

할머니는 방에 걸린 무수한 액자들과 함께 살고 있어 나는 양심이 없으므로 엄마에게 몇 마디를 했다 얼마나 불쌍한지 외로운지 결국은 심심한지 할머니가 엄마는 고집 있고 성질 나빠 아빠랑 살기 어려웠을 거래 우리는 웃다가 콧물을 흘렸다

다음날 어떻게 잘 지낼지 생각하느라 도통 밤에 잠을 못 잤다 희망을 벗어날 길 없어 욕망을 추스를 틈 없이 이른 아침 아이돌 노래에 맞춰 산책하다 고추밭에서 누군가 칼로 난도질한 복권 여러 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죽은 삼촌 방에 앉아 뭘 하는지 할머니는 모른다 노래기 잡고 거미랑 싸우며 그냥 해보는 데까지 해 보는 겁니다 이를 갈면서도 이를 숨기느라 진을 빼고

같이 목욕을 하자더니 결국 혼자 손으로 몸을 문질러 닦았다 나가 있으래서 나가 있었다 할아버지 생전에 할머니가 비누로 씻고 밥을 차리면 비위 상해서 못 먹겠다고 상을 물렸다고 한다 그깟 소리 듣기 싫어서 그때부터 물로만 문질러 닦았다는데

이도 없고 밥 먹고 솟아야 할 기력도 권태도 없어 보이는 할머니와 저녁을 먹는다 기름 친 음식이 먹고 싶어 우유에 탄 진한 커피도 마시고 싶어 죽겠는 와중에 어김없이 체한다 할머니가 내 커다란 배를 문질러 준다

늙은 엄마를 사랑하지 못할까 눈물 찔끔 흘리는 내게 희망이 절망이 될까 한 글자 쓰는데 벌벌 떠는 내게 마을의 수호신 장승처럼 너무나 큰 할머니 끈질긴 여름밤 비는 쏟아지고 미물들이 발광을 한다 할머니 옆에 꼭 붙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 우뚝 선 자존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신나리_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대학원 박사 과정


 

 

 



할머니·어머니·나로 이어지는 여성…서사의 저력 육화한 수작

시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낯선 언어와 다른 시선뿐만 아니라 이미 익숙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정서들을 재배치하는 데서도 온다. 먼저 ‘새들의 주식회사’는 말과 이미지를 빚어내는 제작술이 돋보였다. 동봉한 작품들의 수준 또한 두루 균질한 편이어서 신뢰할 만했으나 완성에 급급한 나머지 시적 공간이 더 확장되지 못하고 발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래된 습관’ 외 네 편은 당대의 그늘진 삶을 다루면서도 활달한 어조와 아이러니한 맥락 속에서 시상을 곱씹게 하는 힘이 있었다. 다만, 함께 읽은 작품들에서 탈골하듯 드러나는 비유의 도식성은 숙고를 요청하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당산에서’ 외 네 편은 자기 안으로 함몰되지 않고 타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몸과 마음을 돌리는 시적 운동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당선작은 할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지는 여성 서사의 저력을 육화한 수작이다. 독백이나 넋두리 수준의 사담에 연루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그 또한 상투화된 기우로 만들어줄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우리는 기꺼이 시인의 모험에 함께하기로 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의 공덕이 부식토로 깔려 있음을 잊지 않고 정진하길 바란다.

김사인 손택수 진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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