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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2024] 미싱/성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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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49회 작성일 2024-09-26 21:20:3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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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성욱현

 몸에 맞추어 옷을 만들던 시절은 지났다
 우리는 만들어진 옷속에 몸을 끼워넣는다

​ 입지도 않는 옷을 산 걸 후회했고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옷이 쏟아지다니, 이게 뭐니
 창고에 갇힌 미싱은 소리 없이 울면서 혼자 돌아갔겠다

 할머니가 늙어가는 소리처럼
 소리 없이 할머니를 입는다

 미싱을 배울 때가 좋았어
 할머니는 사라질 것만 같은 쵸크 선을 따라서
 엉킨 실을 풀며 매듭을 새기며 몸에 맞는 옷을 만들었겠다
 미끈하고 곧게 선 재봉틀 위를 걸어가던 할머니는

​ 두 발을 가지런히 하고 누워 계신다
 열여덟 살 소녀가 누운 나무 관, 삐걱거린다

 새 옷에서는 차가운 냄새가 난다
 몸은 언제나 헌것이라 옷보다 따뜻한 것일까
 치수를 재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며
 할머니는 오래된 치마처럼 낡아가며, 얇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나를 한 벌의 옷으로 만들었다는 걸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거실 한쪽으로 미싱을 옮긴다
 미싱 가마에 기름칠을 하던 할머니도
 오래도록 팔꿈치가 접혀 있었다

 여기 앉아보세요
 눈발이 창에 드문드문 박음질을 하고 있어요

[심사평]

 "엉킨 실 풀고 매듭 새기는 것…인생이라는 서사시의 숭고한 첫 장"

시의 언어는 전달 가능성과 전달 불가능성 사이를 오간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것은 언어의 운명이기도 하다. 시는 '정보'의 도구로 전락한 언어를 '선언'의 자리로 되돌려놓는다. 선언이라면, 시는 교환되기보다는 제출되는 것이며 그로써 한 사람의 생을 증언하는 유일한 목소리가 된다. 인생은 정보의 틈 사이로 희미하게 멀어지거나 그 틈 사이에서 반짝이는 신비를 통해서만 인간의 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언컨대, 시 말고 다른 언어로 쓰여진 삶이 인생일 리 없다. 그렇다면, 모든 인생은 인간의 육체로 쓰는 시인 셈이다.

그것이 심사자들이 '미싱'을 젤 위에 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사라질 것만 같은 쵸크 선을 따라" 엉킨 실을 풀기도 하고 매듭을 새기기도 하며 "몸에 맞는 옷"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은 언제나 헌것이라 옷보다 따뜻한 것일까"라는 놀라운 질문은 "눈발이 창에 드문드문 박음질"하는 풍경과 맞물려 인간이 쓸 수 있는 서사시의 숭고한 첫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물었던 개가 죽었다/ 내가 더 강해지기도 전에"로 시작하는 당선자의 또 다른 시 '이사'도 그렇거니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문장에 밴 섬세한 시선 덕분에 심사자들은 일찌감치 당선자를 결정한 뒤 당선작을 고르는 기쁜 고심을 누릴 수 있었다. 당선자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본심에서 함께 검토한 '당신에게 맞는 온도'는, '건강함'이란 말로 설명되는 시들이 대체로 무거운 시어를 통해 세계의 원리를 포착하려는 과욕을 쉽게 노출하는 데 비해 평이하면서도 진솔한 언어로 아픈 어머니를 씻는 아버지의 지극한 일상을 깊이 감내한다는 점에서 깊은 감명을 주었다.

'판토마임'은 '낯선 매혹'에 사로잡힌 언어들이 자칫 그 매력의 배후를 놓쳐버리고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데 대한 반성처럼, 훌륭한 이미지를 구사하면서도 특별한 순간을 가능케 하는 근원에 접근하려는 고투를 멈추지 않아서 반가웠고, '낙하'는 시가 의미 용량으로 해석되는 관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문맥 이면에 도사린 예감을 통해 그 의미를 부드럽게 전복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분명 우리는 이들의 독자가 될 것이다.

[당선 소감]

 "방향 모른 채 詩 날리던 소년에게 당선이란 의미있는 궤적 찾아와"

1994년 여름에 태어났습니다. 기록적인 폭염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몸에 열이 많았을까요. 저는 비 오는 날이 좋았습니다. 비 오는 날 창가에 서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제 마음이 화창한 날에는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시 쓰기를 곧잘 멈추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시인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바뀌었나 생각해봅니다. 열심히 하루를 펼치고, 활자를 따르며 시를 날립니다. 아직도 제 시는 방향을 가늠할 수 없고, 한순간 추락하기도 하고, 쉽게 젖습니다. 그럼에도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하릴없이 땅을 찍는 머리보다 손끝을 떠나는 비행의 순간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다행입니다. 이제 저의 궤적에도 의미가 생겼습니다. 계속할 겁니다. 저의 기록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 찾아왔으니까요.

부름에 답하겠습니다. 저를 호명해주신 시인님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단국대학교 교수님들,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수많은 친구, 동료, 작가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당신들의 그늘 아래에서 싹트고 피어나 여물어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습니다.

예술은 연결되어 있음을 선명히 느낍니다. 시는 동화와, 동화는 시와 닮았습니다. 제가 누나와 닮은 것처럼. 어머니와 아버지와 닮은 것처럼요. 친구와, 동료와, 스승과 닮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과도 닮아가고 싶습니다.

성욱현 시인
1994년 밀양 출생
2021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22 대산창작기금 동화부문 수혜
천안역 인근 책방 악어새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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