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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일보] [2024] 솟아오른 지하/황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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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53회 작성일 2024-09-26 21:23:0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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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아오른 지하/황주현

  몇 겹 속에 갇히면
  그곳이 지하가 된다

  4시 25분의 지상이 감쪽같이 4시 26분의 지하에 세상의 빛을 넘겨주는 일, 언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상의 지하화가 도모되었을까 땅을 판 적도 없는데 다급한 말소리들은 지표면 위쪽에들 있다 조금 전의 당신의 양손과 두 볼이, 주름의 표정과 웃음이, 켜켜이 쌓인 말들이 들춰지고 있다 기억과 어둠이 뒤섞인 지상은 점점 잠의 늪으로 빠져드는데 누구도 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몸이 몸을 옥죄고 있다 칠 층이 무너지고 십오 층이 무너졌다 그 사이 부서진 시멘트는 더 단단해지고 켜켜이 쌓인 흙은 견고하게 다져졌다 빠져나가지 못한 시간이 꽁꽁 얼어붙는 사이 아침과 몇 날의 밤이 또 덮쳤다 이 깊이 솟아오른 지하엔 창문들과 쏟아진 화분과 가느다랗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있다 뿔뿔이 서 있던 것들이 무너지며 모두 하나로 엉킨다

  이 한 덩어리의 잔해들은 견고한 주택일까 무너진 태양은 나보다 위쪽에 있을까 부서진 낮달은 나보다 아래쪽에 있을지 몰라 공전과 자전의 약속은 과연 지금도 유효할까? 왁자지껄한 말소리들이 하나둘 치워지고 엉킨 시간을 걷어내고 고요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싶은데

  백날의 잔해가 있고 몸이 몸을 돌아눕지 못한다

​  검은 지구 한 귀퉁이를 견디는 맨몸들,
  층층이 솟아오르고 있다

[심사평]

​재난 현장을 과격하지 않고 따뜻하게 파헤쳐

예심을 거쳐 열 세 분의 시들이 보내졌다. 어떤 분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그중 한 분만 선(選)하라는 임무이니 악역인 셈이다. 읽어나가다 보면 그냥 내려놓게 되는 시들과 거듭 읽게 되는 시편들로 나뉜다.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또다시 읽어가다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그 기준이란 게 있다면 쓴 분의 마음이 읽을수록 점점 더 명징하게 드러나는 시들이다. 그 글 속 ‘마음’이 우리네 삶의 ‘맨살결’이라고 불릴 만한 실감으로 다가오게 되면 끝까지 내려놓을 수 없게 된다.

올해의 당선작은 ‘솟아오른 지하’다. 재난의 현장을 차분한 시선으로 파헤친다. 그러나 과격하지 않다. 견고하게 질서 짓는 문장은 문학적 수련의 깊이를 짐작케 하고 그 시선의 따뜻함은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도 깊이 사유한 흔적이다. ‘솟아 오르고 있’는 감염된 권력과 성장의 이면에 도사린 검은 재난(지하)의 그림자는 지금 우리의 내외면의 강렬한 ‘은유’로 읽힌다.

끝까지 견준 작품은 ‘거울 일지’ 외와 ‘향기로운 못’ 외 등의 응모자였다. 운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쓰시리라.

​장석남 시인

[당선 소감]

황홀한 불면을 당분간 즐기고 싶다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김수영 ‘구름의 파수병’)는 아직도 산정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 자신이 없었다. 날아가는 제비를 바라보며 외롭고 쓸쓸했으나 그마저도 부끄러운 저녁은 불을 켜지 못했다. 시로서 고백하고 시로서 반성하고 시로서 다시 꿈꾸는, 시와는 반역된 생활은 누추하고 게을렀지만, 때론 치열했다.

너무 치열해서 자주 허기졌던 불혹의 변두리에서 시도 굶었다. 시와 각방을 쓴 20년의 세월이 통째로 훅 직선으로 지나갔다. 어둡다기보다 캄캄한 저녁은 몸 뉘기에 바빴다. 사방 흙벽이 조금씩 햇빛의 두께만큼의 유리창으로 갈아 끼워지는 동안 몸은 고단한 필체로 시(詩)를 써댔을까. 오래 굶었는지 시는 군불을 때면 혓바닥으로 춤추는 굴뚝의 연기처럼 반응했다. 그렇게 다시 詩 짓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바짝 들어간 힘을 빼고 키 낮은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며 골방의 詩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시의 골방은 불면으로 환해서 바깥 풍경들이 그대로 내게 들어와 목판화 속처럼 돋을새김 되곤 할 것이다. 이 황홀한 불면을 당분간 즐기고 싶다.

오랜 식구 같은 ‘화성문협’ 문우들과 시의 꼬인 덤불을 쉽게 풀어주신 윤석산 시인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풍산초 43기 벗들과 지겹도록 어깨동무하고 있는 안동 경안고 문우회와 ‘맥향’ 문청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경상일보 신춘문예를 열어주신 분들과 ‘솟아오른 지하’에 따뜻하게 손잡아 주신 심사위원들께 두고두고 영원히 진심으로 감사한 맘 아끼지 않겠습니다. 불러 본 기억이 없는 내 이름도 불러 봅니다. “주현아 고맙다.”

황주현 시인
경북 안동 출생
화성문인협회, ‘덤’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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