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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의 시

 

유리병 모종-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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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29회 작성일 2021-11-19 11:26:0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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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모종
  정미경

티베트 고원 어느 집 텃밭에
양배추 모종이 어린 양들처럼 심어져 있다
깎아지른 산비탈이 하늘을 접어
해를 거두어가고 대신
그늘을 풀어놓을 때
농부는 집안에서 키 작은 유리병을 들고 나온다
훈훈한 초여름 공기를 가두듯
양배추 모종 위에 병을 씌운다
고원의 산 그림자가 밤새 뜯어먹지 못하게
옛날 보급 투쟁하던 빨치산들
그 속 빈 추위로부터 막아주기 위해
뚜껑 없는 유리병을
나직이 씌운다
괜찮은 하루하루가 또
겹겹이 되는 일이 어디 바깥의 일일까
어린잎들은 제 속을 웅크려
산그늘 추위도 파고들지 못하는
겹겹이 될 때까지,
칼끝이 머뭇거릴 만큼의
아삭한 날밤의 무늬를 두를 것이다
미닫이문 열고 집안에 들여놓듯
유리병 속에서 잠드는 모종들
지나가는 바람 한 줄은 풀어진 곡선일까
못 본 척 병의 바깥을 돌아나가며
온기와 습기를 꾹꾹 누를 때
병 속의 모종은 여린 숨 몰아쉬며
한 겹 또 한 겹 차오른다

-시작 신인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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