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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의 시

 

망치에 대하여-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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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32회 작성일 2021-11-19 11:26:5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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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에 대하여
  정미경

오늘, 초여름을 걸어 나오다
이웃이 고추밭에 지주 대 세우는 것을
한참동안 지켜보았다
아주 착한 정렬(整列)을 나란히 세워놓고
망치로 쾅쾅 박아 넣고 있었다
어디쯤, 딱 그만큼의 깊이가
고추 포기를 굳건히 지탱해줄 깊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니까, 망치는 깊이에 관한한
어떤 현자(賢者)보다도 깨달은 존재다
못과 쐐기와 말뚝을 망라하고
딱 그만큼의 눈금을 읽으며
소용에 깊이를 파고드는 것이다
언젠가 온갖 땅을 누비는 초록들의 뿌리가
망치에 견줄만하다고 여긴 적 있었지만
망치가 방치한 깊이의 끝
그 끝에 잠자리를 앉히는 것을 본 후
망치가 한 수 위라는 것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망치가 모르는 깊이 또한 있으니
시퍼런 물속이거나 눈가에서
꽃잎이 뒤집히는 사람의 속이거나
아니 더 깊은 망치의 의중이 내리친 손가락의 고통,
그 고통 든 사람이 고개 숙이고
끙끙 잠시 자신의 몸을 다듬는
찡그린 얼굴의 깊이가 그것인데
그건 망치가 저도 모르게
질끈 눈감은 순간인 것이다

-시작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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